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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비가시적이고 즉각적인: 기송관부터 광섬유에 이르는 미디어 인프라구조의 지리학 (제이슨 파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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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비가시적이고 즉각적인: 기송관부터 광섬유에 이르는 미디어 인프라구조의 지리학 (제이슨 파먼)

아마도 독자 2023. 8. 28. 14:42
-이 글은 <Media Theory> 저널 2권 1호(2018년)에 실린 JASON FARMAN의 「Invisible and Instantaneous: Geographies of Media Infrastructure from Pneumatic Tubes to Fiber Optics」를 번역한 것이다.

-주석은 PC를 통해 봐야 오류 없이 볼 수 있다.

-오역에 대한 코멘트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서론

 1990년대 후반 닷컴 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기술 사업가인 랜돌프 스타크(Randolph Stark)는 월 스트리트 인근을 거쳐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은행과 증권 거래소 사이에 광섬유 케이블(fiber optic cables)을 설치하기 위해 도로를 굴착하고 있던 일꾼들을 보았다. 스타크는 맨해튼의 기술 관련 밋업(meet-up)에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 날 저녁 좀 더 일찍이, 스타크의 동료는 뉴욕에 수 마일에 달하는 기송관(pneumatic tube) 라인이 있었고, 이 라인이 우체국들 사이에서 2만 통의 편지를 쏘아 보냈었다고 스타크에게 말했다. 밋업에서 집으로 가던 때 스타크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굴착하고 있는 큰 기계를 보았는데, 새롭게 굴착된 구멍에서 단지 몇 피트 아래에 인프라구조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들은 모두 불필요한 양의 노동과 비용한 피트 당 천달러처럼 보였다(그림1). 그는 그때 새로운 사업적 모험을 상상했다. , 1890년대 설치된 오래된 기송관에 광섬유를 운용하는 것. 데이터의 이동 거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는 회사, 아파트, 그리고 사무실 건물로 하여금 더 빠른 인터넷 연결을 수신할 수 있도록 할 터였다.

그림1.&nbsp;뉴욕시 거리 17번가와 6번가의 교차로 아래에 존재하는 기송관의 신경절, 1906년. Image courtesy of the National Archives, Washington, D.C.

 광섬유 시대의 인터넷과 기송관 시대의 우편 체계 간에는 유의미한 유사점이 있다. 우리 때와 비슷하게, 기송관 시대는 사람들이 전례 없는 속도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창조했다. 1897년부터 뉴욕시 거리 아래에는 27마일의 관이 부설됐는데, 이는 압축 공기를 사용하여 도시 사방에 있는 우체국 간에 우편 금속용기를 쏘기 위함이었다. 600통의 편지를 담을 수 있는 놋쇠 금속용기를 밀어 보냈던 기송관 우편 체계는 미국에서 시작되기 전 유럽에서는 대중적이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필라델피아(기송관을 사용하기 시작한 미국의 첫 번째 도시), 뉴욕, 보스턴, 세인트 루이스, 그리고 시카고에서는 기송관 시스템이 우편 배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터였다. 금속용기(canisters), 혹은 사람들이 캐리어(carriers)”라 불렀던 것은, 10분마다 우체국에서 출발해 도시 거리 아래를 누비고 다녔으며, 심한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를 타임스퀘어에서 중앙 우체국(the General Post office)까지 삼분 안에 전송할 수 있었다. 지하에서 운용되면서 새롭고 기술적으로 진전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연결했던 이 관(tubes)을 통해, 그 시대는 마치 즉각적인 연결의 가능성이 현재 목전에 와 있다고 느꼈다. 기송관 시대와 광섬유 시대의 유사점에 주목한 스타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집집마다 기송관이 운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떤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건가?”

 기술이 우리로 하여금 전례 없는 속도로 서로와 연결될 수 있도록 한 역사의 계기들이 존재한다. 이런 계기들은 기다림(waiting)을 완전히 제거하는 듯 보이는 속도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기송관 우편 체계의 성공은 이런 계기 중 하나였다. 온 국가의 도시들은 기송관 우편 체계를 설치하려 아우성이었다. 우편을 금속용기에 넣고 압축 공기로 밀어내 도시의 거리 밑에서 보내는 것은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이자 근대적인 것의 본질로 여겨졌다. 기송관 시스템은 자동차로 가득한 혼잡한 거리가 있는 도시를 가로질러 우편과 소포를 배달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에 이 시스템은 근대적 삶의 상징이었다. 기송관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게 한 기술적 도약의 전위를 대표했다.

 도심지의 지하에 있어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관의 지리적 배치는 즉각적인 메시지 전달이라는 생각을 둘러싼 문화적 상상계(a cultural imaginary)를 부채질하는 데 도움이 됐다. 기송관의 지리는 기송관의 성공에 핵심적인 것이었으며, 미디어가 매일매일 사용되는 방식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중이 자신들의 정체성에서 이 새로운 미디어의 역할을 어떻게 상상했는지 역시 형성했다. 기송관을 지하에 배치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 부합했다. 첫째로 이는 실용적이었고, 메시지 금속용기가 지면 위의 삶을 방해하는 일 없이 도시 도처에로 전송될 수 있도록 했다. 혼잡한 도시 거리나 열악한 날씨와 씨름하는 일 없이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은 기송관 시스템의 주요 장점 중 하나였다. 기송관 시스템은 위의 거리가 혼잡해지거나 통행할 수 없게 되는 정도에 상관없이 한결같은 속도로 배달할 수 있었다. 둘째로, 기송관 시스템은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상상력으로 하여금 시스템과 관련된 신비주의를 창조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 신비주의는 기송관의 물리적 현실로부터 완전히 탈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시스템의 확장을 지지했던 1915년의 시사만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리를 건너는 데서 막혀버린 투박한 우편 차와 그와는 대조적으로 강 아래 관을 통해 발사되고 있는, 우편이 담긴 미사일 모양의 금속용기다. 이 만화는 우편 차 옆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What We Have)”이라 적고, 우편-미사일 옆에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What We Ought to Have)”이라 적으면서 이 둘을 대조하고 있다(그림2).

그림2.&nbsp;1915년 12월 5일자에 발행된 브롱크스 홈 뉴스(Bronx Home News)에 실린 드로잉. 이 드로잉은 투박한 자동차와 그것이 지닌 한계를, 할렘 강 아래에서 발사되는 기송관 금속용기의 미래적인(그리고 군사적인) 미사일과 비교하고 있다. 도시의 거리 아래에서 압축 공기에 의해 추진되는 용기 안에 우편을 담아 전송하는 것은 코스모폴리탄적이고 모던한 것의 정수로 여겨졌다. Image courtesy of the National Archives, Washington, D.C.

 이 논문에서, 필자는 메시지 전달 기술을 통한 즉각적인 연결(시스템이 실제로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연결했느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강력한 문화적 매력을 가지게 되는 방식을 탐구하고자 한다. 즉각적인 연결은 우리 문화에서 여전히 대단히 강력한 개념이다. 즉각적인 연결은, 접촉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휴대폰 없이는 집을 떠날 수 없다는 느낌 뒤에 존재하는 동기 요인이다.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연결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시금석이다. 즉각적인 것이라는 마법의 씨앗은 전신(the telegraph)과 기송관 시스템의 시작과 함께 19세기 중후반에 심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념은 기다림에서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제공하기보다는 소비주의적 태도를 추동하는 하나의 신화다. , 이런 마법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변화시키는 방식이 시스템의 기술적 능력 그 자체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 시스템이 휴대폰 위의 텍스트 메시지이든 도시 전역에 걸쳐 메시지를 보내는 기송관이든 간에 말이다.

미디어 지리의 고고학

 이 논문은 동시대 미디어(인터넷, 모바일 테크놀로지)와 과거의 미디어(기송관 우편 체계) 간의 계보적 연결고리를 찾아냄으로써 미디어 고고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한다. 논의되는 각각의 기술을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국면들 내부에 위치시킴으로써매개된 연결을 맥락화했던 윤곽과 인프라구조에 주목함으로써, 필자는 미디어 특정적 분석(Hayles, 2004)을 활용함과 동시에, 과거의 미디어와 우리 시대의 기술들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상호텍스트적으로(intercontextually)” 사유하고자 한다(Huhtamo and Parikka, 2011; Chun, Fisher, and Keenan, 2005; Gitelman, 2006; Kittler, 1999; Standage, 1998; Marvin, 1988). 이런 방식으로, 필자는 일상의 지형에 걸쳐 있는 비가시적인 인프라구조의 정동(affect)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미디어부터 디지털 시대의 모바일 디바이스에 이르기까지의 계보적 자취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비가시성(invisibility)의 영향력은 물질적 현실의 영역 바깥에서 기능하는 즉각적인 것의 신화를 강화한다. 이런 배치 양식은 리사 파크스(Lisa Parks)인프라구조적 문맹(infrastructural illiteracy)”이라 부른 것을 만들어내며(2012: 66), 이는 결과적으로 전기 시스템이든, 하수관이든, 방송 네트워크든 일상에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인프라구조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도록 사회화된대중의 창조로 이어진다. 그녀가 덧붙이길, “사람들만 이런 시스템을 알지 못하도록 사회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프라구조 역시 종종 비가시적이거나 투명한 것이 되도록 목적성을 띠고 설계된다. 지하에 침잠되든, 천장이나 벽에 의해 은폐되든, ‘자연으로 위장하든 간에 구축된 환경과 통합되면서 말이다.”(Parks, 2012: 64)

 이런 접근법은 섀넌 매턴(Shannon Mattern)도시 미디어 고고학이라 이름 붙인 것에 대한 그녀의 방법론적 접근법에서 끌어낸 것이다(2017: xx). 매턴은 동시대 도시의 미디어를 자주 간과되는 과거의 미디어 혹은 망각된 과거의 기술과 연결 지음으로써 담론과 먼지, 상상계와 I자형 대들보, 스케치와 센서의 순환적이고, 얽혀있고, 지저분한 혼합물인 도시 미디어의 역사”(2017: xx)를 요구한다. 매턴의 작업은 캐롤린 마빈(Carolyn Marvin)(1988),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Jay David Bolter and Richard Grusin)(1999), 그리고 리사 기텔만(Lisa Gitelman)(2006) 같은 미디어 역사가들의 연구에 기반하는데, 이들은 역사적 단절(disruption)의 계기들에 토대를 둔 미디어 모델을 반박한다. 대신에 이들의 연구는 미디어가 물질적이고 개념적인 계보 내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볼터와 그루신이 쓰듯, “오늘날 그 어떤 미디어도, 그리고 틀림없이 그 어떤 미디어 이벤트도 다른 미디어로부터 고립되어 문화적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여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힘들로부터 고립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1999: 15) 기텔만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유통되어 있는 지배적인 양식이 존재한다면, 나는 이것이 미디어를 자연화하거나 본질화하는 경향짧게 말해, 우리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미디어의 역사를 그것들에 양도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론이 핵심적이라 주장한다(2006: 2). 이 방법론은 이런 기술들이 1) 한물간 미디어에서 좀 더 새롭고 더 나은 미디어로 향하는 자연스러운 진보라거나, 2)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을 확고하게 만드는 과거로부터의 파열(ruptures)이라고 하는 기술 결정론적 관념에 반하여 작동한다. 따라서, 한 문화에서 새로운 기술들이 시작될 때, 우리는 이런 미디어가 오래된 형식들을 재매개(remediate)”하는 방식들을 추적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런 흡수를 감당하는 개념적이고 문화적인 상상계를 그려낼 수 있다.

 이 논문은 또한 두 기술적 시대에 걸쳐 있는 비가시성과 즉각적인 것의 토포스(topoi-역자 설명: topoitopos의 복수형이다)를 추적함으로써 에르키 후타모(Erkki Huhtamo)가 확립한 토포스 연구에 토대를 두고 있다(1997: 222). 후타모의 방법론은, 개념(혹은 토포스)을 다른 시대들에서 되풀이되는 것으로 연구하면서, 개념들이 문화적 상상계를 명료하게 만드는 방식과 개념들이 한 개념의 계보에 손짓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토포스는 양식적인 것에서 우화적인 것에 이르는 공식들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는 문화적 전통의 구성 요소를 만들어 낸다.”(Huhtamo, 1997: 222) 이런 문화적이고,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은 인간의 미디어 경험을 형성한다(Huhtamo, 1997: 222). 이 구성물은 우리가 미디어에 대해 취하는 체화된 접근법뿐 아니라, 미디어가 그 시대에 명성을 얻을 때 사회가 그 미디어에 부여하게 되는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부각되는 하나의 적절한 토포스는 즉각적인 것이 지리적 거리를 압축하는 방식이다. “새로운미디어는 지리적 거리를 축소하고 사람들을 이전의 기술보다 빨리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중심으로 자신이 구축한 상상계 내에서 종종 이전의 것을 대체한다. 마빈이 전화 같은 19세기의 기술적 발명품들을 논하며 썼듯이, “어떤 미디어가 거리, 시간, 그리고 체화된 현존에 맞서 승리를 거둘수록, 그 미디어는 더욱 흥미로워지고, 더욱 미래의 길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1988: 194)

 미국에서의 기송관 우편 체계의 흥망성쇠는 우리 시대의 기술적 국면 그리고 시간, 메시지 및 기술 간의 관계를 둘러싼 우리의 느낌들에 대한 논평을 제공해준다.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술은 우리의 대기 시간을 제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대중에게 기술적 향상에 대한 감각을 주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신화에 이끌리는데, 바로 우리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게 할, 계속 가속화하는 연결 속도라는 신화이다. 이 신화는 우리와 우리로부터 지리적으로 분리된 사람들 간의 간극을 메워주는 도구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도구들은 우리가 멀리 있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사람들은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로부터 떠날 때, 지역 혹은 주(, states) 혹은 국가를 변경할 때, 친밀성의 간극을 메우는 것을 도와줄 도구를 추구한다. 뉴욕 같은 도시 내에서도, 이런 도구들은 인구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단절감과 고립감을 느끼는 공간에서 연결을 약속한다. 기다림 없는 커뮤니케이션과 연결에 대한 이런 약속은 강력하며, 이런 기술들에 대한 투자를 창조하는 데에 복무한다.

관을 경유하는 근대성

 파리의 기송관을 연구한 미디어 이론가인 몰리 라이트 스틴슨(Molly Wright Steenson)은 이렇게 썼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역사는 하수도를 통해 흘러간다라고 썼다면, 아마도 근대성은 기송관을 통해 흘러갔을 것이다.”(2011: 86) 파리의 기송관 우편체계, 혹은 포스트 쁘느마티크(Poste Pneumatique)1866년부터 1984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것 중 하나였다. “근대성이 기송관을 통해 흘러가는 방식 중 하나는 관이 시간과 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기 보단 하나의 생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혁신과 발전을 그 지지대로 삼고 있는 기술적 문화에서 고양되는 것은 대중의 상상력에 비집고 들어가는 신화다. 기술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속도를 붙여줄 때, 기송관이 그것을 가능케 했을 때, 관 속의 편지가 실어 나르는 단어들만 내용물인 것은 아니었다. 이 논문이 계속해서 논의하듯, 내용물은 또한 시간이다. 이는 단순히 누군가 러브레터를 받았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기송관을 통해서 전송된 러브레터를 받았다는 문제이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언급했듯, 가속화된 문화의 표지는 속도에 의해 규정된 내용물이다(2007: 51; 또한 여기를 보라, Redhead, 2004: 50).

 기송관은 철로(railroad)가 영국 내 떨어져 있는 지역들을 연결하고 이동 시간의 속도를 늘려주기 시작했던 때와 동일한 시기 즈음 1853년에 런던에서 처음으로 우편을 배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순간이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메시지 전송의 속도 증가를 시사했기 때문이다. 톰 스탠디지(Tom Standage)가 자신의 책 빅토리아 시대의 인터넷 The Victorian Internet에서 언급했듯, 이 시대 이전까지 메시지를 보내는 데는 배달원이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필요했다(1998: 2). 그가 쓰기를, “이 불가피한 지연은 수천 년 동안 일관되게 남아 있었다. 이는 헨리 8, 샤를마뉴, 그리고 줄리어스 시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조지 워싱턴에게도 삶의 실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삶의 속도는 느렸다.” “말이나 배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무엇, 전신, 철로, 그리고 기송관이 등장한 이후에서야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삶과 사람들의 서로간의 연결의 속도를 높이게 됐다(Standage, 1998: 3).

 베를린이나 비엔나 같은 다른 도시들도 곧 런던을 따라 자신들만의 기송관 우편체계를 확립하려 했다. 뉴욕에서, 기송관을 이용한 최초의 실험들 중 하나는 압축 공기에 의해 도시 한 블록의 길이를 따라 추진되는 인간 크기의 지하 자동차로서, 아마 이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도시에서 구축되고 있는 하이퍼루프(Hyperloop)의 첫 선조였다. 워렌(Warren) 스트리트와 머레이(Murray) 스트리트 사이 브로드웨이 아래에서 운영되었으며, 지하철이 구축되기 이전에 지하 교통수단을 위한 도시의 첫 번째 시도였던 이 실험은 금세 시청 거리를 가로질러 자리를 잡았으며 뉴욕의 교통수단에서 중요한 양식이 되기 위해 경쟁했다. 결국, 이 실험은 차를 추진시키기 위해 필요한 공기압이 차를 멀리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놀이시설에 가까운 것이 되는 데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송관의 약속은 뉴요커들의 잠재의식에 뿌리내렸다.

 미국의 우정성(Post Office Department)의 고향이자 우편 체계의 토대인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기송관 우편 체계를 개시한 첫 도시였다. 관의 시작은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관을 통해 전송된 첫 품목들은 미국 국기로 감싼 성경책, 고양이, , 그리고 중국산 컵이었으며, 이는 모든 사람들의 점심식사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배달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보도에 따르면, 시카고의 한 대형 실험용 용기에 담겨 관을 통해 전송된 13살짜리 소년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관은 지름이 8인치였으며, 대개는 3인치의 관을 가지고 있던 유럽의 것과 차별화되었다. 미국 우정성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즉 우리가 대역폭(bandwidth)이라 부를 수 있는 이것은 유럽의 대역폭의 7배였다. (이 말인 즉슨, 프랑스가 217마일의 관을 가지고 있었던 데 비해서, 미국에서 우편을 위해 기송관을 이용했던 다섯 개의 도시에서 관은 42마일이었다.)

 시스템이 가동되자, 사람들은 이 근대적인 시스템을 통해 놀라운 속도로 편지와 작은 소포들을 서로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수만 개의 노트, 메모, 영수증, 러브 레터, 그리고 사업 계약들이 관을 통해 전송되었다. 그 시스템은 설치하고 유지하기에는 엄청나게 비쌌다. 의회는 기송관이 실제로 비용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지 조사할 위원회를 매해 설립했다. 1910년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관의 설치를 위해서는 1마일 당 12만 달러가 소요되었으며(오늘날로 치면 1마일 당 약 3백만 달러에 달한다), 정부는 관의 유지를 위해서는 매해 1마일 당 17천 달러를 지불했다(오늘날로 치면 1마일 당 약 423천 달러에 달한다). 우체국과 수송 도로 위원회의 위원장은, 이대로라면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매해 약 10억 달러(오늘날 25조 달러에 달함)의 예산 책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인프라구조를 배치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랜돌프 스타크가 1990년대 후반 닷컴 붐 시대에 월스트리트 인근에서 1마일 당 약 520만 달러에 달하는 광섬유 케이블을 설치하기 위해 도랑을 파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던 장면과 다르지 않았다.

 기송관을 다룬 위원회 보고서들 각각에서는, 관이 실제로 메시지 수송의 다른 양식들보다 빠른지 알아보기 위해 테스트가 수행되었다. 우편 노동자들은 이용 가능한 배송 체계들의 속력 테스트에 매해 참가했다. 이 테스트에서, 노동자들은 특정 정거장에서 두 개의 편지를 받아, 편지에 소인을 찍고, 그 다음 하나는 관을 통해 보내고 동시에 다른 하나는 우편 트럭에 실었다(그림3). 이는 정시에 이루어졌다. 이 경주는 정부가 매년 관에 지출하는 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루어졌다. 1931, 펜실베이니아 역 거리의 바로 건너편에 있는 중앙 우체국에서 출발한 편지가 관을 통해 브루클린 다리를 가로질러 브루클린 우체국 접수실로 도착하는 데 17분이 걸렸다. 우편 차량은 중앙 우체국을 떠나 출발 40분 후에 브루클린 역에 도착했다. 중앙 우체국에서 월스트리트에 도달하는 것은 기송관의 경우에는 17분으로 비슷했다. 하지만, 우편 트럭은 맨해튼의 느린 교통 체증으로 인해 78분이 소요되었다.

그림3.&nbsp;기송관 용기에 우편물을 적재하는 그랜드 센트럴 역 우체국의 노동자들, 1949년. 개방된 용기는 각각 600 개의 편지를 채워 담기 위해 늘어서 있다. 이 편지들은 역을 떠나 시간이 측정될 것이다. 자동차와 비교해서 얼마나 빠른지 알기 위해서 말이다. 이는 관을 유지하는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Image courtesy of the National Archives, Washington, D.C.

 몇 년 동안, 기송관의 배송 시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반면 자동차를 이용한 배송은 점차 느려졌다. 1931년과 1949년의 테스트에서, 편지가 중앙우체국에서 어퍼이스트사이드 87번가에 있는 그레이시 우체국으로 관을 통해 이동하는 데 12분이 소요됐다. 1930년대 초에 자동차로 그곳에 도착하는 데는 38분이 소요됐다. 18년 후에는, 한 시간이나 걸렸다. 우정성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감독했던 의회는 수년간 이 테스트를 수도 없이 실행했고 계속해서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각각의 보고서에서, 전문가, 경영주, 그리고 보통의 후원자들은 동일한 것을 입증했다. 관은 빠르다, 관은 다른 선택지들보다 빠르다, 그리고 관은 극심한 눈보라와 같이 지상에서의 배달에 한계를 부여하는 조건들에서도 우편을 발송할 수 있다.

기송관 시대의 쇠락

 1893년에서 1953년까지 미국에서 사용된 시기 동안, 기송관 우편 체계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것은 전례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연결시켰다. 기송관 우편 체계가 기다려야 할 필요성을 제거해주진 못했지만(기술이 얼마나 빠른가에 상관없이, 기다림은 언제나 메시지 송수신의 일부였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속도로 메시지를 전송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기송관의 메시지가 자동차로 전달되는 메시지에 비해 얼마나 빠르게 배달될 수 있는가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숫자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간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지각은 한 시대의 기술에 따라 변화하며, 종종 새로운 기술로 인해 삶의 속도가 바뀌는 방식에 대한 문화적 상상계의 영향을 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메시지를 기다린다는 것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기다림은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실제 시간, , 혹은 심지어 초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맥락에서 경험된다. 기송관을 통한 우편배달은 해마다 변하지 않았다. 매해, 메시지가 관을 통해 중앙 우체국에서 그랜드 센트럴 역으로 이동하는 데는 4분이 걸렸다. 시스템이 시행된 54년 동안 이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에 걸쳐 시간에 대한 지각은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변동했다. 자동차는 눈부신 속도로 발명되고 수용되었다. 1910년대에는 비행기가 발명되었고 우편을 배달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 기송관 시대에 발생했고 도시화가 진행 중이었다. 뉴욕시의 인구는 이 기간 동안 약 5배 증가하여 관이 폐기될 무렵에는 약 150만 명에서 780만 명으로 늘어났다. 관이 영원히 폐쇄되었을 때의 뉴욕의 일상은 관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을 때의 뉴욕의 일상과는 매우 달라 보였다. 관은 특정 속도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을 일관되게 유지했으나, 시간에 대한 인간의 지각은 그 시스템에 가해지는 요구와 함께 메시지를 기다린다는 것의 의미를 변형시켰다.

 기송관 시스템의 초기의 실패는 한 남자, 즉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에 의해 임명된 우정 장관인 알버트 시드니 벌레슨(Albert Sydney Burleson)으로부터 전해 내려온다. 만약 기송관이 받은 천벌이라는 게 존재했다면 그것은 벌레슨이었는데, 그는 의회와 협력하여 관의 능률에 대한 보고서를 연이어 작성했지만 그 결과를 무시하고 1918년에 처음으로 기송관 우편 체계 전체를 폐쇄했다. 거의 일반적이었던 주장, 즉 이 시스템이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주장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여전히 엄청나게 비쌌고, 벌레슨은 자신의 부서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각주:1] 결국, 벌레슨은 이 시스템을 유지하라는 의회 법안에 대해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뉴욕 같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관의 쉭쉭거리는 소리는 1918년에서 1923년까지 조용해졌다.

 뉴욕시의 체계는 벌레슨의 우정 장관 재임기간이 끝난 후 1920년대 초에 부활했고 1950년대까지 지속됐다. 기송관의 폐기에 대한 몇 가지 공식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엄청난 양의 우편물을 도시 전역에 운반할 수 있는 자동차의 능력이 관에 비해 장점으로 꼽혔는데, 기송관은 더 큰 관으로 대체되고 필요한 압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큰 발전소로 대체되지 않는 한 적재량(capacity)을 결코 늘릴 수가 없었다. 또한 그 시스템은 수리하기가 힘들었다. 파이프가 지하 4~8피트 깊이에 있었기 때문에, 일꾼들은 유지보수나 수리를 목적으로 파이프를 열기 위해 땅을 파느라 거리를 폐쇄해야만 했다. 1909년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지의 한 기사는 관에 걸려 버린 용기를 찾아내고 수리하는 고된 과정을 묘사한다. 두 명 혹은 세 명의 노동자가 한 팀이 되어서, 관의 경로를 따라 파견된다. 노동자들이 공기압을 확인할 수 있도록, 두 블록마다 파이프의 일부가 표면으로 나온다. 이들은 공기압이 없는 파이프를 발견할 때까지 파이프 각각을 열어본다. 기사에 나오길, “이들은 자신의 몸이 더워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다음에 이들은,

용기가 다음 정거장으로 전진하게 만들거나, 여분의 기압을 통해 왔던 정거장으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이 방법이 실패하면, 도로가 갈기갈기 찢어져야 할 가능성이 높다. … 브루클린 다리의 뉴욕 터미널에서는 일부 굴착 공사로 인해 한 차례의 파손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파이프를 찢어서 그것을 중계(relay)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New York Herald, 1909)

 

 다른 이유들이 더 있었겠으나, 기송관은 아마도 많은 기술들이 으레 그렇듯이 기술이 연결하는 지리들에 걸쳐 있는 시간과 속도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기술들이 얼마나 잘 일치하느냐에 대한 지각의 변화 때문에 폐기되었을 것이다. 뉴욕시 같은 장소에서 해가 지남에 따라 기다림에 대한 관념이 변화했듯이, “즉각적인 것을 둘러싼 기대들 역시 변화했다. 기술적 구식화(obsolescence)는 종종 동시성(synchronicity)(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정보를 공유하는)과 지연(delay)이라는 관념 간의 증대하는 분할에 의해 추동된다. “, 즉각적인 것은 종종 우리가 지연을 정의하는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정의된다.”(Lampert, 2012) 전신의 시대 혹은 기송관의 시대에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했던 것은 그 시대에 특정적인 것이었다. 교통수단의 새로운 양식과 두 차례 대전 후의 새로운 글로벌 연결성의 부상과 함께 즉각적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지각이 변화하면서, 이런 관념들은 50년 후에는 참이 아니게 되었다.

 기송관의 방치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는 굉장히 친숙한 것, 즉 기술적 구식화였다. 기술은 이전의 것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더 새로운 기술로 대체된다. 관 시스템은 우편 노동자들이 말이 끄는 마차로 우편을 배달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그림4).

그림4.&nbsp;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우편 마차, 1913년. 기송관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그것은 이 느린 마차와 함께 우편물을 배달했다. 이런 비교됨은 기송관이 즉각적인 연결을 가능케 했다는 생각을 뒷받침했다. Image courtesy of the National Archives, Washington, D.C.

 철로가 배달 과정의 일부이긴 했지만, “라스트 마일(last mile)”(커뮤니케이션 인프라구조의 최종 부분, 즉 사용자의 집이나 회사에 배달하는 부분을 가리키는 산업 용어)은 느리고 곧 구식이 되어버릴 교통수단 양식에 의해 이행되었다. 자동차가 말이 끄는 우편 마차를 구식으로 만들어버리고 우편 배달의 두드러진 양식이 되자, 라스트 마일이 달성되는 속도도 변화되었다. 기송관은 결코 라스트 마일 기술이 아니었고, 실용적인 수준이 될 수도 없었다. 대신에, 기송관은 우편이 한 허브에서 다른 허브로 배송될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편물을 손으로 배달하거나 메시지를 수령하기 위해 우체국으로 걸어가야 했다. 기송관의 설치에 잇따라 곧 자동차가 등장했으며, 이는 그 자신만의 속도에 대한 관념을 가져왔다 (빠른 도입으로 맨해튼 전역에서 교통 체증을 불러왔지만 말이다).

 속도에 대한 이런 정의들은, 한 기술이 즉각적인 것과 지연에 대한 개인의 감각을 변형시키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 최근 작가이자 음악가인 데이먼 크루코프스키(Damon Krukowski)가 하나의 풍부한 사례를 제공해주었다(2017). 1980년대 초 보스턴에서 자란 그는 레드 삭스(Red Sox)가 홈런을 치거나 게임에서 이길 때 일어났던 현상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것이 일어나자마자, 함성이 도시 전체에 퍼져나갔다. 리글리 필드(Wrigley Field)에 있는 사람들은 집에서 텔레비전 수상기를 통해 시청했던 사람들과 함께 함성의 합창에 참여했다. 모두가 동시성 내에서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텔레비전 수상기가 디지털 방송으로 바뀌자, 아날로그 시스템에서 디지털 수신기로의 번역으로 인해 개시된 지연이 존재했다. 이는 처리할 수 있는 자체 네트워크 지연 속도(latency)가 있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집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과 결합되어, 다른 순간에 응원 소리를 분출하는 보스턴을 만들어냈다. 홈런이나 승리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기술에 토대를 둔 다른 간격들(intervals)에서 사람들에게 수신되었다. 사람들은 최신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을지라도, 이 기술들 때문에 즉각적인 것에 대한 관념은 바뀌었다.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은, 순간의 집단적 경험이 아니라 순간의 개인적 경험을 강조하는 흥미로운 지연이었다.

 이와 같이, 기송관은 그 시대에 즉각적인 것과 지연이라는 구별되는 경험을 창조했다. 이런 관념들은 사람들이 시간을 경험했던 맥락에 의해 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관 자체는 변하지 않았던 반면에, 관의 메시지 내용물의 일부는 시간이었고, 시간은 사람들의 지각이 변화함에 따라 해마다 변동했다. 기다림과 지연은 기송관의 부상과 쇠락 모두를 초래했던 즉각적인 것의 바로 그 직조물에 구축되었으며, 이 관은 엄청난 수의 편지를 수송할 수 있는 더 느리지만 더 싼 트럭에 의해 대체되었다. 수십 년 이후에, 이메일은 기송관의 부상을 촉발시켰던 즉각적인 연결이라는 동일한 신화를 떠맡을 것이다.

닷컴 시대를 위해 관을 부활시키기

 1950년대 기송관 우편체계가 폐기되자, 파이프는 도시 거리의 아래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휴면 상태로, 그리고 미국 메시지 교환의 역사에서 잃어버린 부분으로 남아있었다. 랜돌프 스타크가 맨해튼의 기술 밋업에서 기송관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가 20대 중반이었다. 그가 부활시키고자 했던 관은 반세기 동안 폐기되어 있었지만, 우편 관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람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우체국에서 관을 사용했으며, 관은 20세기 내내 백화점, 은행, 그리고 뉴욕 공립 도서관에서 일상의 일부였다. 1950년대에 자란 미국인들은 백화점 카운터에 서서 점원에게 구매를 위한 돈을 건네면 이 돈이 쉭하는 소리를 내며 마법처럼 관으로 빨려 들어가 가게의 다른 층으로 이동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딸깍 소리가 나면, 점원은 고객의 영수증이 들어 있는 관을 회수했다. 기송관의 유산은 병원이나 은행 같은 특정 부문에서 여전히 번성 중에 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의 공립 도서관에서, 책은 기송관 시스템을 통해 배달되는데, 이는 이용자들로 하여금 도서관 뒤의 보존서고에 접근하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정보 접근이라는 우리들의 마법과 공명하는 속도로 책을 배달해주기도 한다. 전례 없는 속도로 관을 통해 지식에 접근하는 것은,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는 데 필요한 시간의 양을 줄여주는 기술을 통해 아이디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감각을 이용자들에게 주었다. 브루클린 공립 도서관에서 이 시스템은 2000년대 초반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관 내부에서 많은 책들이 압력으로 인해 폭발한 이후에는 폐기되고 제거되었다. 스타크는 버려진 관을 인터넷의 주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다. 스타크는 인터넷을 일상적인 고객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단계를 가리키면서 인터뷰 동안 필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모두가 라스트마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케이블을 설치하는 것이 한 방법이었지만, 케이블을 고객들에게 분산시키고 그것을 경쟁사보다 더 빠르게 하는 것이 닷컴 붐(그리고 오늘날도 여전한)의 핵심적인 시험대였다. 최초의 웹 브라우저가 10년 전에 도입되었고, 사람들은 이미 모뎀을 통해 콘텐츠를 기다리는 것을 꺼려했다. 인터넷은 사람들에게 기송관 시대 때와 유사한 느낌, 즉 우리가 미래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술이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부여했다. 그렇긴 하지만, 회선을 가로지르는 데이터의 느린 이동은 즉각적인 연결성의 신비로움을 방해했으며 통신 회사가 고치고자 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사용자들이 점점 더 커지는 웹 사이트와 디지털 파일에 대해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한 것과 같이, 다이얼 접속(dial-up) 인터넷에서 DSL(digital subscriber line, 디지털 가입자 회선)으로의 이동은 라스트 마일 문제를 실례로서 보여주었다. DSL을 통해서 고객들은 인터넷에 지속적으로 연결되고, 네트워크에 액세스하는 사용자의 수에 따라 크게 변동하지 않는 전용 회선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객이 사용자의 인터넷 회사가 운영하는 중앙 허브에서 3마일 이상 떨어져 있으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DSL은 속도가 떨어졌다. 스타크의 프로젝트는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방식으로 이런 센터에 연결되게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다루었다. “닷컴 붐의 절정의 시기에, 시간은 가장 비싼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속도를 높이고자 했던 어떤 제안이든 매력적이었으며, 스타크의 프로젝트는 골드만 삭스 같은 회사에게 매우 매혹적이었는데, 이 회사는 스타크가 자신의 기송관의 꿈을 시작할 수 있도록 처음에 도우려고 했던 회사였다.

 스타크는 뉴욕 거리 아래에 기송관 시스템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있는지 알고 놀랐다. 이 관들은 1900년대 초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우체국을 연결했으며, 사람들의 집에 직접 배달되기 전에 우편물을 가지러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최소 12 블록마다 우체국 정거장이 위치해 있었다. 이 관들은 맨해튼을 브루클린의 중앙 우체국과 연결하는 브루클린 다리를 가로질러 운용되는 관을 통해 맨해튼 너머로 뻗어나갔다.

 스타크의 계획은 광섬유 케이블을 이 관 내부에 설치해 각 우체국을 특정 지역의 인터넷 허브로 삼는 것이었다. 각 우체국이 기송관 메시지의 배달을 위한 허브 역할을 했듯, 광섬유 케이블은 우체국 정거장에서 가까운 아파트 건물과 회사로 뻗어나가 이 건물들이 인터넷의 주요 허브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게 할 터였다. 이 각각의 위치에서, 스타크는 통신 회사와 협력하여 사용자가 데이터 전송 속도를 저하시키는 거리에서 회선을 연결하지 않고도 인터넷에 연결될 수 있게 하는 서버를 설치하려 했다. 그러면 메시지와 데이터는 이 새로운 시스템에 기대되는 속도를 가지고 사람들의 컴퓨터로 스트리밍될 수 있을 터였다.

 스타크는 이 아이디어의 특허를 냈다. 하지만, 1950년대 폐기된 이래로, 기송관을 소유한 자가 누군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타크는 아카이브를 뒤진 후에 시()가 기송관을 소유한 회사를 상대로 재산세 소송을 제기했다는 점을 알아냈다. 이 이후 회사는 관을 시에 양도했지만, 이 소유권 이전은 시의 기록에서 없어졌으며, 시는 이 방치된 인프라구조를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스타크는 광섬유 케이블 설치를 위해 통행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고 뉴욕시와 함께 협력하기 시작했다. 시는 관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광섬유 시대를 위해 관을 사용할 아이디어는 스타크가 가지고 있었다. 시는 이 망각된 인프라구조를 부활시키기 위해 그와 협력해야 할 터였다.

 몇 달 후에, 닷컴 버블이 터져버렸고 프로젝트를 위한 모든 재원은 증발했다. 스타크가 말한 바에 따르면, “닷컴 충격이 2000년 후반에 발생하기 시작했고, 통신 부문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으로 도금된 와이파이 케이블을 갖고 있다 해도 돈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재정적으로 끔찍한 시기였죠.” 이 이후에 곧 세계무역센터의 타워가 9/11에 무너져 내렸고 뉴욕시의 인프라구조와 혁신과 관련된 모든 것은 중단되었다. 사업가들과 기술 혁신가들은 더 이상 시와 그 건물들에 대한 세부 정보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기록물, 지도, 그리고 설계도는 보안조치로 공적 접근에서 배제되었다.

 시가 9/11의 트라우마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도시 계획 설계자들은 점점 증대하는 인터넷 접근에 대한 요구를 위해 인프라구조를 확장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는 버라이즌(Verizon)과 독점 계약을 맺어 뉴욕시 거주자들에 대한 모든 광섬유 접근을 감독했다. 이 계약은 1890년대 기송관이 설치됐던 바로 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때 엠파이어 시티 서브웨이(ECS, Empire City Subway)는 모든 전화선을 수용했던 도관 시스템(the conduit system)을 운영할 수 있는 독점적인 접근권을 부여받았다. ECS는 결국 버라이즌의 자회사가 되었고, 이들은 도시 전역에서 운영되는 케이블에 대한 통제를 인터넷 시대까지 지속해 왔다. 버라이즌을 고수했을 때의 장점은 필요한 새 케이블의 설치에 대한 비용을 시가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버라이즌이 이 비용을 댈 터였다. 그 대신, 버라이즌은 수익성이 좋은 독점 서비스를 갖게 됐다. 스타크가 필자에게 말하길, “저는 1년 정도 늦은 거였죠.”

 기송관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재배치했던 한 장소는 뉴욕 허드슨가 60번지에 있는 구 웨스턴 유니언 건물에 있었다. 이 장소는 전신 메시지 서비스의 중심지였으며, 대부분의 메시지 서비스는 종이에 인쇄된 후 기송관을 통해 건물 안에서 전송되었다. 관은 1928년 건립된 건물의 다양한 층을 연결했다. 전신이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고 1960년대 통신업계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웨스턴 유니언은 1973년에 건물을 비우고 떠났다. 이 이후에 곧, MCI에 이어서 다른 통신회사들은 건물에 이미 존재하는 오래된 관과 인프라구조를 활용하기 위해 이 건물에 입주했다. 튜브: 인터넷의 핵심으로 향하는 여행 Tubes: A Journey to the Center of the Internet이라는 저서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앤드류 블룸(Andrew Blum)은 인터넷을 구축할 터였던 통신 회사들이 동일한 장소에 모일 수 있었던 능력이 메시지 전송을 위한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고 언급한다(2012: 174). 한 회사의 서버가 다른 회사의 서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허드슨가 60번지의 밋 미(meet me)” 룸은 데이터의 이동 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지연 속도를 줄여주었다. 그가 쓰길, “필연적이다시피, 건물 내부에서 이런 네트워크들은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으며, 허드슨가 60번지는 하나의 허브로 진화했다. 인터넷의 역설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 네트워크들이 동일한 장소에 있는 경우에만 거리의 제거가 발생한다는 역설.”(Blum, 2012: 174) 현재, 허드슨가 60번지는 전 지구적으로 인터넷의 핵심 장소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미국과 전 세계 다른 국가들을 연결하는 해저 인터넷 케이블이 롱아일랜드와 뉴저지에 상륙해 결국 이 건물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케이블은 데이터를 국가의 일부 지역 전체에 전송하기 이전에 기송관을 통해 서버들을 연결한다. 블룸이 말하듯, 이 건물과 런던의 텔레하우스(Telehouse) 인터넷 허브와의 연결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인터넷 연결의 링키지 중 하나를 구성하고 있다.

결론

 막 등장한 기술의 이용자들은 새로운 시스템이 서로 연락을 취하는 방식의 속도를 높여줄 것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게 된다. 전신과 기송관 시스템 이후의 기술들이 실제로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속도를 높여왔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용자들은 그들을 기다리게 만드는 시간 지연을 언제나 가지게 될 것이다. 모든 최신 기술들을 동반하는 즉각적인 것이라는 관념은 결코 충족되지 않으나, 이 관념은 이런 미디어의 이용자들이 사회적 연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영향력을 분석하는 데 핵심적인 것은 이용자들이 서로 간의 메시지를 위한 대기 시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술들이 계속 가속화하는 삶의 속도라는 감각을 우리에게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메시지는 지리적 거리를 가로질러 전송되기 때문에 우리의 메시지 간의 시간 간극은 기다림이라는 행위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될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방식은, 우리가 연락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최신 기술보다는 점점 더 도시화되는 풍경에서의 우리의 사회적 삶에 대해 더 잘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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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는 우정 장관이 우편 노동자들의 분리 정책, 즉 흑인 노동자들과 백인 노동자들은 우정국에서 함께 일해서는 안 된다는 정책을 지지했던 때와 동시에 발생했다. 이 문화적 국면에서, 우편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미디어 전달 네트워크와 같았다. 우편은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을 형성하는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중립적이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겐 유용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참여할 수 없는 불능이든 혹은 인종으로 인한 사용에서의 문화적 배제든 간에, 이것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여기를 보라. Deanna Boyd and Kendra Chen, “The History and Experience of African Americans in America’s Postal Service,” National Postal Museum, https://postalmuseum.si.edu/AfricanAmericanhistory/p5.html. 알버트 S. 벌레슨의 전체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Anderson, A. N (1967) “Albert Sidney Burleson: A Southern Politician in the Progressive Era,” doctoral dissertation, Texas Technological College, USA.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