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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정보 이론에서 프랑스 이론까지: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사이버네틱스 장치 (버나드 디오니시우스 게이건) 본문
-이는 시카고 대학에서 발행하는 <크리티컬 인콰이어리 Critical Inquiry> 38호 1권에 실린 Bernard Dionysius Geoghegan의 「From Information Theory to French Theory: Jakobson, Lévi-Strauss, and the Cybernetic Apparatus」를 번역한 것이다. 주석은 오류없이 보기 위해서 PC를 통해서 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맨 상단의 이미지는 본문에 등장하는 음성 합성기 보더(Voder)의 사진이며, 이는 원문에는 첨부되어 있지 않음을 미리 밝힌다. 그 외의 이미지는 모두 본문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다. -오역에 대한 지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1962년 구조주의적 분석의 대작 『야생의 사고 The Savage Mind』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합리적이고 질서가 잘 잡힌 절차로 인해 유럽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추론이 “원시적 사유”보다 우월하다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신념을 뒤집는 데 착수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서발턴 문화를 향한 온정주의적 관용에 호소하지도 않았으며, 원주민의 지식이 갖고 있는 상황적이거나 국지적인 성격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정보 이론 분야에서 작업하고 있는 서구 과학자들이 최근에야 발견한 것을 오래전에 인식하고 이해했던 야생의 사고가 가진 위대한 천재성을 상찬했다. 최근에야 발견한 이것은, 세계가 우리의 인식과 해석을 요청하는 이산적(discrete) 계열의 신호와 메시지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1야생의 사고는 모호한 기호 체계로서의 자연계의 동물, 식물 그리고 여타의 측면들을 다룸으로써 해석의 원칙을 발견했는데, 이 “해석의 원칙이 가진 경험적 가치와 실재와의 일치는 근래의 발명들―통신기술, 컴퓨터, 그리고 전자현미경―을 통해 최근에서야 우리들(서구인들)에게 드러났다”(SM, p. 268). 2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인과 야생인 사이의 수 세기 동안의 분할 이후에, 전자의 도구가 후자의 직관을 마침내 입증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선언에 따르면, “그러므로 인간 지식의 전체적인 과정은 닫힌계의 성격을 띤다”(SM, p. 269).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을 우연히 마주한 정보 이론가라면 누구든 놀라움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당시, 정보 이론은 개선된 암호화 코드가 어떻게 더 효율적이고 에러 없는 데이터 전송을 가능케 하는지를 연구하는 데 전념했던 커뮤니케이션 공학의 하위 분야였다. 디지털 컴퓨팅과 사이버네틱스의 제휴는 정보 이론에 대한 광범위한 명성과 관심을 가져왔지만, 위성통신에서 부상하고 있던 소수의 응용프로그램과는 거리를 둔 정보 이론은 소규모의 전문화된 공학자 공동체를 위한 대개는 가설적인 탐구의 영역이었다. 3프랑스 구조주의의 아버지는 어떻게 디지털 미디어 기기(instrument)와 테크닉들을 서구 문화와 원시 문화 사이의 위대한 조화의 대리물로서 상찬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미디어, 기술, 글로벌 과학, 그리고 필자가 사이버네틱스 장치라 이름 붙인 것의 회집(assembly)의 역사에 대한 조사를 수반한다. 장치(apparatus)라는 용어를 통해 필자는 상호 연관된 두 현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레비-스트로스와 그의 동료인 러시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은 구조주의 연구를 성립시키고 인문 과학을 현대화할, 최근에 발명된 미디어 기기와 테크닉의 잠재력을 환영했다. 4이런 점에서, 사이버네틱스 장치는 연구의 물질적 보조물이나 가이드로 작용했던 기기와 테크닉들―이는 수학적 절차, 도표적 전략, 그리고 기술을 포함한다―을 나타낸다. 둘째로, 필자는 이런 물질적 기기와 테크닉들이 표면상 비물질적인 이상(理想), 즉 연구자들에게 역사적, 정치적 혹은 분과적 차이에 구애받지 않는 탐구의 절차들을 제공했던 이상으로 변형되는 것을 지식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케 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5이런 변환은 사이버네틱스 기기들의 유사초월적인 힘에 대한 참조를 통해 분과적, 정치적, 그리고 국가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자와 기관들의 전략적 연합―연구 공동체의 도구화―을 가능케 했다. 6이 논문은 잠재적으로는 구별되는 이런 장치의 유형들―한 편에는 기기, 다른 한편에는 이질적인 행위자들의 전략적 협약―의 흐려짐(blurring)이 어떻게 사이버네틱스 장치의 구축을 가능케 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 결과로 초래된 역사는 이 장치가 어떻게 “프랑스” 이론, 미디어 연구, 정보학 및 글로벌 과학의 발달을 한데 묶어놓았는지를 인식할 수 있는 자원, 방법론 및 관점의 모든 것을 제공해 준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내부에서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의 호소는 이 방치된 역사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관점에서 인문학을 재구상하려는 대학 차원의 최근의 노력들을 고려해볼 때, 이런 수정주의적 역사는 시의적절할 것이다.
장치(apparatus)라는 용어를 불러들임으로써, 필자는 푸코가 dispositif(디스포지티프) 7라 불렀던 것에 대한 최근의 번역을 채택하고 있다. 이 용어는 영어에서 mechanism, device, deployment, 혹은 disposition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처럼, 번역가들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푸코 자신에 따르면, dispositif는 이질적인 앙상블(ensemble) 가운데 설립된 관계들의 전략적 체계를 지칭한다. 제도, 건축,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담화, 그리고 기기는 급박한 필요성에 대응하여 장치(apparatus)로 조직될 수 있는 요소들 사이에 존재한다. 8이런 dispositif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차이에 둘러싸인 관계들을 구축하고 지식의 형식을 형성하는 전략들을 탐구할 지침을 제공해준다.
영어 용어인 apparatus(아파라투스)는 dispositif라는 용어와 기기 혹은 도구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다른 프랑스 용어인 appareil(아파레이유)를 결합한다. 필자는 이런 번역의 우여곡절을 투명하게 만들기보다는,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모호성, 즉 사이버네틱스 장치뿐 아니라 미디어와 관련된 많은 탐구와 논평들에도 특유한 모호성을 주제화하기 위해 이 번역의 우여곡절을 이용하고 싶다. 이 모호성이란, 차이를 조정하고, 유예하고, 혹은 합리화하는 인식론적 형상(dispositifs)으로 변형될 수 있는 물질적 기기들(appareils)의 능력을 말한다. 이런 개념적 운동은 위에서 인용된 레비-스트로스의 구절에서도 이미 명백하다. 제일 먼저 레비스트로스는 이산적 신호로 조직화된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기기들―통신기술, 컴퓨터, 전자공학―의 힘을 상찬하며, 다음으로 그는 이 기기들과 기기들의 능력, 즉 초문화적이고 초학제적인 인간 지식의 “닫힌계”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찬한다. 영화 이론가, 책 역사가, 그리고 여타 미디어 역사학자들은 외견상으로 지식을 재조직하거나 합리화하는 dispositifs로 변형될 수 있는 미디어 appareils의 경향성에 친숙하다. 9
두 용어가 뚜렷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별개의 현상을 단일한 영어 용어인 apparatus 내부에 연접시키는 것은, dispositif라는 용어의 푸코적 용법의 특징인 독특한 통일성-속의-분열(disunity-in-unity)을 시적으로 구현한다. 게다가, 이런 의미론적 탈구의 이용은 사이버네틱스 장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었던 언어와 분과 간의 일종의 생산적인 용어상의 미끄러짐을 주제화한다. 필자는 <dispositif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탐구에 집중함으로써, 개념적인 흐려짐을 인식하는 동시에 지식의 전략으로서의 흐려짐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dispositif가 무엇인가>에 대한 더 포괄적인 설명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10
또한 사이버네틱스 장치라는 개념은 사이버네틱스와 인문 과학을 다루는 최근의 연구가 맞닥뜨린 두 가지 어려움을 해결한다. 첫째로, 대부분의 이런 텍스트들은 사이버네틱스 혹은 정보 담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결과적으로, 기기, 실험실 및 제도적 배열들을 포함하는 과학적 생산의 거대 장치는 역사적 그림에서 사라지고 해석학과 언어로 대체된다. 11둘째로, 관련 있는 문제는 영향력 및 개념적 일관성이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관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종종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자연과학자들의 이해와 인문과학자들의 이해 각각의 사이에 있는 틈새에 걸려 넘어지거나 그것을 건너뛰어 버렸다. 사이버네틱스 간의 극복할 수 없는 모순들이 공학자와 인문과학자들 각각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에 좀 더 조심스러운 학자들이 그것들을 목록화 했다면, 12좀 더 종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학자들은 1950년대와 60년대 사이버네틱스 용어가 확산된 것이 일원적인 사이버네틱스 패러다임 혹은 정보 패러다임 내부에서 글로벌한 지식이 공고해지는 것을 표지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이런 구별들을 거칠게 다뤘다. 13이런 접근법 양자―담론에 대한 주목과 규칙성(혹은 규칙성의 결여)에 대한 탐구―가 맞닥뜨리고 있는 기저의 어려움은 사이버네틱스의 언어와 질료 내부에 있는 통합성 혹은 정체성을 은연중에 추구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하지만 미디어 연구, 과학사, 문학연구의 최근 문헌들이 보여주듯, 다양한 맥락에서 사이버네틱스의 독특한 힘과 매력적인 요소들을 구성했던 것은 (담론적, 개념적, 물질적, 인공적, 이데올로기적인) 분열과 이질성이었다. 14그래서 필요한 것은 이런 차이들을 어떤 주인 비유(예를 들어, 상황성, 문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담론적인 것)로든 환원하지 않고 다양성을 차이들의 앙상블로 표시하는 방법론이다.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대한 탐구는 질료나 의미 가운데서 일관성을 확립하기보다는 이런 이질성들이 함께 작동하게 되는 방식에 대해 검토한다. 상이한 의제들이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추구될 수 있는 순간에도, 프로젝트, 질료 및 장소의 이질적인 다양성은 동질적인 과학적 토대 혹은 경제적 토대에 기대는 일 없이 서로 연합할 수 있다. 이때, 역사기록학적인 연구의 질문은 <사이버네틱스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어떤 전략과 욕구들이 사이버네틱스의 절합을 조직했는가> 그리고 <이런 연합에서 기인한 지식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 간다.
록펠러 재단, 미디어 이론, 그리고 “전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형제애”
사이버네틱스와 정보 이론에 대한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록펠러 재단과의 연계 와중에 발전되었는데, 이 재단은 과학 분야의 후원자이자 사이버네틱스와 미디어학 연구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록펠러 재단의 임원들은 이런 연구 영역들을 전 세계적인 과학적 개혁 프로그램, 즉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전문가 주도의 합리적인 해결책을 함양하는 것에 토대를 둔 프로그램의 뒤얽힌 측면들이라고 여겼다. 15이 프로그램은 편파적인 정치적 갈등을, 불편부당한 기기와 테크닉들에 토대를 둔 차분한 과학적 성찰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재단의 자연과학 분과 책임자였던 워렌 위버(Warren Weaver)는 1933년에 “과학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재단의 프로그램”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각서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의 차분한 기질보다 더 효과적인 정념과 편견의 적은 없다. 과학은 개인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집단의 지적 습관에 천천히 흡수되어, 사실적인 관점, 건강하고 유연한 회의론, 그리고 증거의 평가에 있어서의 객관성과 관용의 발달에 선두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일컬어진다. … [더해서] 비개인적이고 사심 없는 관심과 이해를 통합하는 유대를 가지고 있는 전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형제애에서 기인한 국제적인 우정과 이해에 대한 헌신이 존재한다. 16
과학에 대한 위버의 비전은 로버트 보일의 과학에 대한 17세기의 이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 이상에 따르면, 과학은 실험적이고 기술적인 적절한 수단을 가지고 논쟁적인 공론장에서 평화롭게 물러나 진실을 생산하는 신사들이 수행하는 고귀한 실천이다. 17하지만, 보일이 과학자들 간의 비개인적인 유대의 원천으로 판단, 목격, 그리고 웅변에 의지했던 반면에, 록펠러 재단은 이성의 보증인으로서의 현대 기술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과 질서정연함을 포용했던 19세기와 20세기 자유주의의 광범위한 경향을 따랐다. 18임원들은 사법 체계, 대중 매체, 정부, 사회 복지 및 위생 서비스를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기술”로 불렀으며, 사회과학자들을 통제를 위한 메커니즘을 식별하고 발전시키는 과업을 가진 공학자들에 비유했다. 19록펠러의 사회 과학은 과학자들이 가진 판단과 목격이라는 권력만큼이나 정치적 갈등과 계급 차이를 통제의 기술들로 대체했다. 20
1936년에 록펠러 재단은 비개인적인 과학적 방법론과 기술적 기기들에 대한 이런 주안점을 인문과학의 연구를 위한 프로그램에 도입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및 기계적 복제와 연계된 응용 연구를 위해서, 문헌학, 훈고학, 그리고 해석학 연구에 대한 지원은 중단되었다. 21재단 이사장인 레이먼드 포스딕(Raymond Fosdick)이 설명하길,
인도 유럽어 동의어 사전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 4권에 대한 주석적 논평에 있어 학자들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치가 존재한다. … 하지만 … 기계화된 시대에서,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이는 인간 삶의 미학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더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해석될 수 있는 방법론이다. 22
록펠러의 자금 지원을 받은 프로그램의 뼈대 내에서, I. A. 리차드(I. A. Richards), 폴 라자스펠트(Paul Lazarsfeld),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그리고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영화와 사진 아카이브를 설립하고, 방송 해석을 위한 내용 분석 테크닉을 발전시키고, 미국과 유럽의 도서관에 현미경 사진 기술을 배치하고, 영화와 라디오로 대중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기획안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2차 대전으로 인해 자리를 잃은 유럽 과학자들을 간학제적인 과학적 장치에 흡수시켰으며, 이 과학적 장치는 전쟁 이후 본국에서 유럽의 과학자들에 의해 계속되고 확장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23뉴미디어 기계장치에 대한 집중은 종종 참여자들의 지적 감수성을 괴롭게 했는데, 포스딕이 추후에 논평을 했을 때 인정한 동시에 기각했듯이, “여기 미국에 있는 학자들만큼이나 인문학 분야의 외국 학자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미국 학생들이 연구 도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 대해 약간의 조바심을 보인다. … [하지만] 기술과 내용 사이에 날카롭게 그어질 수 있는 선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24
에콜 리브르 그리고 도구적 지식
독일어권 학자들이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전시(wartime)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수행했던 뉴욕 소재의 기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프랑스어권 연구자 공동체는 커뮤니케이션학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이 중에는 헝가리 기호학자 토마스 세벅(Thomas Sebeok), 미국 언어학자 찰스 하킷(Charles Hockett),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에콜 리브르 데 오뜨 에튀드(Ecole Libre des Hautes Etudes)(록펠러의 자금 지원을 받은 프랑스어권의 망명 대학)에서 이들과 같이 공부했던 멘토 야콥슨이 있었다. 이들은 또한 「뉴욕 언어학 서클 The Linguistic Circle of New York」, 혹은 미국 내부에서 구조주의 언어학을 진흥하고자 했던 야콥슨의 기관지인 저널 「워드 Word」에도 가지각색으로 기여했다. 야콥슨은 이들로 하여금, 프라하 언어학 서클에서 1920년대와 30년대 동안 자신과 동료들이 발전시켰던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 판본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위스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의 사후 출간된 강연에 토대를 둔 25이들의 접근법은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정의했고, 언어를 이들이 음소라고 이름붙인 소리들, 즉 언어를 달리 구별되는 소리들의 체계로 보는 구상을 지지했다. 26소쉬르는 음소를 (모음성 vocalic, 자음성 consonantal, 비음성 nasal, 조찰성 strident, 강세성 stressed 등의) “변별적 자질(distinctive features)”의 묶음들로 정의했는데, 이 변별적 자질은 한 음소를 다른 음소와 달리 구별 짓는다. 야콥슨은 언어 사용을 인도하는 목적성의 관점에서, 음소 연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이런 접근법에 맞붙였다. 야콥슨에 따르면, 언어에 대한 구조주의적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음소들 간의 대립항의 기본 패턴이 어떻게 언어 체계를 조직하고 의미의 발생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뉴욕에서의 체류는 야콥슨으로 하여금 언어에 대한 완전히 기술자적인 접근을 정교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이는 커뮤니케이션 공학 기기들에 의해 구체화되었고 확증되었다. 이는 유럽에서 발전했던 구조주의 언어학의 확장과 개정에 이르렀다. 소쉬르는 이미 『일반언어학 강의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1916)에서 발화의 생산을 위한 기관의 특징을 “발성 장치(vocal apparatus)[appareil]”로 묘사했으며(그림1) 소리의 분절(articulations)을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테크닉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름의 사용을 장려했다. 27하지만, 소쉬르는 발화의 생산 혹은 연구를 위한 장치와 발화의 소재(material) 그 자체 사이의 날카로운 서술을 통해 이러한 도구적 접근의 균형을 맞추었다. 소쉬르가 한 강의에서 말했듯이, “모스 부호를 보내는 데 사용되는 전기 장치가 그 부호에 대해 외재적인 것처럼, 발성 기관은 언어[랑그]에 대해 외재적이다.” 28
대조적으로, 야콥슨은 현대적인 미디어 기술을 구조주의 언어학의 인식론적 전제조건으로 승격시켰다. 기념비적인 강의 『소리와 의미에 대한 여섯 개의 강연 Six Lectures on Sound and Meaning』에서, 그는 “이런 연구가 낳은 전화, 라디오 및 발성 영화 … 그리고 새로운 정밀 기계들[appareils]”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연구자들로 하여금 발화 자체를 조사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고 선언했다. 29이런 기기들은 덧없는 소리에 대한 영속성 있는 기입을 창조함으로써 발화를 그 자체로 연구에 적합한 물리적 대상으로 제시했다. 야콥슨은 강연 내에서의 이런 선언을 과외 현장 학습으로 보충했다. 언어학 서클의 구성원들은 벨 연구소(Bell Labs)의 공학자들이 개최한 보더(Voder, voice operation demonstrator) 박람회를 보기 위해 맨해튼에 있는 AT&T 강당에 방문했다. 보더는 발화를 일련의 소리로 분해함으로써 발화를 합성했는데, 이 일련의 소리는 음성 키보드를 통해서 문장으로 조합될 수 있었다.(그림2) 발화를 전화 소리의 패킷으로 전송하는 것에 대한 연구소의 고민과 기기의 기술적 설계를 반영하면서, 이 디바이스는 발화를 시간에 따라 분산되는 이산적 단위들로 제시했다. 추후에 벨 연구소의 다른 공학자는 주파수에 따라 발화의 지도를 그렸던 연구소의 “가시적 발화 visible speech” 연구를 설명해주기 위해 에콜 리브르에 왔다. 30야콥슨은 이런 디바이스들이 소쉬르의 주장, 즉 언어가 이산적이고 한정 가능한 단위들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했다.
전시 프로파간다 방송에 기여했으며, 40년대 초에 정보 이론가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과 이웃이었던 31레비-스트로스는 이런 기기들이 소리에 대한 영속적이고 경험적인 기입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연구 공동체를 전략적 장치로 조직하는 형식적 모델과 대상들을 창조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썼다.
(공학자이자 수학자인 클로드 섀넌에 의해 최초로 체계적으로 제시된) 지적 방법론, 즉 커뮤니케이션 이론가들의 작업을 규제하는 지적 방법론의 이론적 형식[미장포름 mise-en-forme, 말 그대로 “형식화되기”]에서만큼이나, (일련의 보다 완벽한 장치[dispositifs]의 이전 모델인) 유명한 보더와 같이 발화를 합성하는 장치[appareils]의 구현에서, 우리는 언어학자들이 도달한 일종의 위대한 해석적 이론들을 인식하게 된다. 이 해석적 이론들은, 인간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질서 있는 요소들의 조합에 의존한다는 점, 각 언어에서 조합의 가능성들은 양립 (불)가능한 조합들의 앙상블에 의해 규제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자체의 규칙의 한계 내부에서 한정되는 것과 같은 담화(discourse)의 자유는 결국 특정한 개연성들(probabilities)에 의해 제한된다는 점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32
그는 벨 연구소 공학자들의 기기와 이론 내에서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견한 것을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방향으로의 개념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즉, 레비-스트로스와 그의 동료들은 전화 공학자들의 영속성 있는 기기, 기입, 그리고 이론적 형식들이 언어의 필수적인 본질을 드러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도구와 이론들이 공학자들의 작업을 규제했던 것처럼, 이제 이것들은 언어 자체를 기술적으로 질서 잡힌 계열들로 변형시켰으며, 이 계열들을 둘러싸고 인문 과학자들의 새로운 장치가 소집되었다.
야콥슨의 언어학적 입력과 사이버네틱스적 출력
미국과 유럽의 미디어 연구와 이론의 구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그리고 계속해서 미치고 있는),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정책상의 변화가 있었는데, 2차 대전 이후 록펠러 재단은 사이버네틱스와 커뮤니케이션 공학을 모델로 한 연구를 위해서 대중 매체와 기계적 복제에 전념했던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아도르노와 크라카우어가 발전시켰던 것과 같은 텍스트적, 역사적, 그리고 비판적 탐구들은, 야콥슨과 그의 동료들이 발전시켰던 구조주의적 접근법과 더 밀접하게 닮아 있는 기능주의적이고 몰역사적인 접근법을 위해 무시되었다. 자금지원의 변동은 록펠러 재단에서 있었던 두 가지의 재편성 기간 동안 일어났다. 첫 번째 변화는 인사문제와 연관 있었다. 전쟁 이후, 재단의 운영은 통신 연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1948년, 뉴저지 벨 전화 회사의 전임 사장이었던 체스터 바너드(Chester Barnard)가 록펠러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레이먼드 포스딕의 뒤를 이었다. 전시 프로파간다 연구에 기여했던 언어학자인 찰스 파스(Charles Fahs)는 1949년에 인문학부의 부 책임자로, 1950년에는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위버는 자연과학부의 부장으로 남아 있었으나, 전쟁 동안 그는 정보 이론과 사이버네틱스 각각의 토대를 닦았던 섀넌과 위너의 중요한 연구를 지도하고 있었다. 위버는 전후에 이 분야들을 진흥하는 데에 전념했다. 두 번째 변화는 의제와 연관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록펠러 재단의 임원들은 위버의 “전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형제애”를 친-미국적이고 반-소비에트적인 주형(mold)에서 재구성하고자 했다. 재단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망명 학자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1948년, 파스는 전 세계의 언어학에 대한 조사를 준비하기 위해 야콥슨을 초청했다. 33야콥슨은 그 과제를 받아들이고 조사 결과를 수집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는 것에 대해 흔쾌히 동의했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던 지정학적 배열과 미국의 이익을 위한 특사로서 과학이 맡았던 특별한 역할에 민감했던 야콥슨은 자신의 유럽 방문이 “미국의 철두철미한 과학적 활동을 국제 학계에 알리는 매우 중요한 [기회]” 34가 될 것임을 파스에게 장담했다.
야콥슨의 최초 보고 이후에, 파스, 위버, 그리고 다른 임원들은 더 큰 연구를 착수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 위해 1949년 12월 22일 야콥슨과 회의 일정을 잡았다. 35회의 1주 전에, 위버는 정보 이론을 인문 과학에 적용하자는 제안이 담긴 섀넌과 본인의 공저서 『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 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의 사본을 야콥슨에게 보냈다. 이 책은 미래의 연구를 위한 야콥슨의 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야콥슨은, “소리와 의미의 문제에 대해 계속 작업하면서, 당신과 섀넌의 책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한층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36라고 대답했다. 야콥슨은 사이버네틱스 기기와 테크닉들에 의해 매개된 간학제적인 공동 작업을 그의 연구에 도입했다. 추후에 파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본적인 것은, 현시대 과학의 다른 갈래들이 제공하는 정제된 디바이스들을 사용해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알아내려고 하는 공통의 노력의 필요성입니다.” 37파스에게 보낸 바로 그 다음의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의미”와 커뮤니케이션 일반의 “진정한 이론을 위한 준비가 아마도 이제 처음으로 마련된” 것이라 주장한 W. 위버에게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이론의 정교화를 위해서는, 언어학자들이 수학, 논리학, 커뮤니케이션 공학, 음향학, 생리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 과학과 같은 다른 분야들의 대표자들과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런 위대한 집단 작업이 성취될 때, 그것은 정말로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38
야콥슨은 러시아어 음소의 분포(distribution)와 빈도(frequency)를 분석하는 데에 섀넌의 통계 기반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사용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위너, MIT의 전자공학 연구소(Research Laboratory of Electronics), 그리고 하버드의 심리-음향 연구소(Psycho-Acoustic Laboratory)를 공동 연구자로 지명했다.
특히 러시아어에 대한 주목은, 다양한 행위자들을 포함하는 초기의 행위자-네트워크(actor-network)라 부를 수 있는 것에서, 푸코가 디스포지티프라 부른 것 혹은 시급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략적으로 정렬된 관계들의 앙상블 내부의 공통 프로그램으로 야콥슨의 제안을 변형시켰다. 이 경우에, 소비에트의 위협이 그 조직화의 문제를 규정했다. 야콥슨은 자신의 연구가 러시아어과의 미국 학생들을 위한 유용한 교육적 자료인 만큼, 그것이 미국 외교관들에게 소비에트적 사고의 이해를 위한 유익한 자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 또한 그는 국제적인 과학 무대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질책을 가할 수 있는 과학적 결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현대 미국과 서유럽의 언어 과학과 인접 분과들의 모든 성취들을 사용해 오늘날의 표준적인 러시아어에 대해 철저히 서술하고 분석하는 것은, 교조적인 숙청으로 인해 공포에 떨며 편협하고 비생산적인 당국의 편견으로 마비된 소비에트의 러시아어 학문이 해낼 수 없는 성취를 국제적인 문화 세계에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스크바 공식 과학의 공허한 국가적 자축과 오늘날 무력하다고 생각되는 서구의 학문에 퍼붓는 그들의 맹렬한 공격에 대한 품위 있는 답변이라고 간주합니다. 39
미국과 서유럽 (즉, 비-공산주의적인) 과학 공동체를 사이버네틱스에서 등장한 방법론과 기기들의 주변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야콥슨의 연구는 전 세계적인 과학자 형제애의 육성, 미디어 연구와 기기를 통한 인문 과학의 개혁, 그리고 반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힘에 대한 공개적 망신주기를 포함한 록펠러 재단의 많은 목적들을 충족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록펠러 재단은 야콥슨이 과학적 보편주의와 당파적 정치를 혼합시킨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1950년에 야콥슨은 “언어, 논리, 그리고 상징주의 Language, Logic, and Symbolism”라는 새로운 재단 인문학 프로그램 하에서 5만 달러의 5년간 보조금을 받았다. 재단이 발행하는 연간 공식 성명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분석은 클로드 E. 섀넌씨와 워렌 위버씨가 작업했던 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을 현용 언어에 응용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줄 것입니다.” 40야콥슨에 대한 지원은 실험과학의 도구와 테크닉을 모델로 한 유용한 연구를 위해 자금 지원의 우선순위를 점검했던 광범위한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보고서는 새로운 의제를 정치적 용어로 정당화하면서, 현재 세계의 정세에서 “[고립된, 그리고 이론적인 탐구가 가진] 상아탑의 태도는 철의 장막의 태도가 그런 것처럼 불합리한 것이 될 것이다” 41라고 설명했다.
사이버네틱스 구조주의의 등장
야콥슨의 보조금은 2차 구조주의라 불릴 수 있는 것(포스트-프라하학파, 소쉬르주의, 프랑스어권의 경향, 그리고 비-블룸필드주의), 막 부상하고 있었던 사이버네틱스 운동, 그리고 반-소비에트적인 정치적 의제 간의 전략적 수렴을 절합하는 메커니즘들의 협정과 회집의 시작을 알렸다. 이 요소들은 서로에 있어 전적으로 낯선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로부터의 야콥슨의 탈출, 초기에 벨 연구소에 대해 가졌던 그의 관심, 위너와 알고 지내던 관계는 아마 프롤로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록펠러 재단의 보조금은 당시까지 우연에 맡겨져 있던 관계들을 조직하고 강화했다. 야콥슨이 그의 연구 장치를 확립하자마자, 록펠러 프로그램의 특징들―기술관료적이자 기기를 이용한 탐구, 초국가적이고 간학제적인 협력, 합리적 탐구라는 탈을 쓴 반-소비에트적 성향―은 록펠러 재단 임원들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 진전되었으며, 하버드-MIT-유럽이라는 연합의 축 내부에 뿌리를 내렸다. 이런 협력에서 기인한 지식의 모델과 대상들은 언어학자와 공학자들 간의 미래의 협력을 위한 영역을 부호화, 합리화, 재생산, 확장했으며, 이는 곧이어 부가적인 모델, 대상, 그리고 협력을 만들어냈다.
야콥슨은 즉시 유럽에 있는 동료들에게 그의 새로운 사이버네틱스적 시도를 홍보했다. 1950년 초, 위버는 야콥슨의 요구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의 사본을 파리에 있었던 레비-스트로스와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이레(Alexandre Koyre)에게 보냈다. 42같은 해 5월, 야콥슨은 록펠러가 자금을 지원한 3개월간의 유럽 체류에 착수했으며, 그 기간 동안 그는 언어학자 찰스 오그던(Charles Ogden), 도날드 프라이(Donald Fry), 루이 옐름슬레우(Louis Hjelmslev), A. W. 드 그루트(A. W. de Groot), 또한 레비-스트로스와 자크 라캉(Jacques Lacan)과 만났으며 그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43야콥슨은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에게 거의 틀림없이 사이버네틱스와 정보 이론의 가장 최근의 발전을 소개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은 자신들의 학문적 글쓰기에 사이버네틱스와 새로운 수학적 방법론에 대한 논평을 도입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야콥슨은 MIT의 전자공학 연구소(RLE)까지 진출해, 록펠러의 자금 지원을 받은 이니셔티브에서 언어학자 모리스 할레(Morris Halle)와 공학자 콜린 체리(Colin Cherry)를 공동 연구자로 뽑았다. 이들은 음소의 분포와 변별에 대한 정보 이론적 재해석을 함께 발전시켰으며, 이는 “러시아어 음소에 대한 논리적 서술을 위하여 Towards a Logical Description of Russian Phonemes”(1953) 44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정보 이론으로부터 끌어낸 이진법적인 방법을 사용한 저자들은 한 음소를 다른 음소와 구별하는 데 있어 5.38비트의 정보가 필요하며, 자연어가 전송하는 다른 모든 특색 있는 자질들이 잉여적(redundant)이라고 주장했다. 레비-스트로스, 호켓, 세벅이 참석한 인류학자와 언어학자들의 모임에서 한 1952년의 발표에서 야콥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운용 중에 있는 언어 연구에 있어, 언어학은 두 연합 학문―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과 정보 이론―의 인상적인 업적에 의해 강력하게 견고해졌습니다. C. E. 섀넌과 W. 위버, N. 위너와 R. M. 파노(R. M. Fano)의 작업에 영향을 받지 않은 논문이 거의 단 한 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징후적입니다. …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인코더(encoders), 디코더(decoders), 잉여성(redundancy) 등과 같이 분명히 그들의 용어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45
그는 “구조주의 언어학과 커뮤니케이션 공학자들의 연구가 종국에는 수렴되”며(RJ, p. 556) 서로를 증진시키기 위한 개념적 자료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런 논평을 교육과 연구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교화했다. 야콥슨은 경성과학(the hard sciences)으로부터 빌려오는 동시에 경성과학에 되돌려주길 열망하면서, “구조주의 언어학이 커뮤니케이션 공학을 위한 유용한 학교인 것과 같이, 나에게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오늘날의 언어학자들을 위한 좋은 학교인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RJ, p. 559). 위너는 『인간의 인간적 활용: 사이버네틱스와 사회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에서 야콥슨의 작업에 대해 상찬하는 논평을 함으로써 이런 주장을 입증했다. 46
야콥슨은 MIT의 위계구조 내에서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그는 전자공학연구소에 있었던 커뮤니케이션 공학자 레오 L. 베라넥(Leo L. Beranek)과 언어학자 윌리엄 로크(William Locke)와 함께, 인문학과 사회과학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 공학을 진흥시키려는 도서 시리즈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47추후에 그는 전자공학연구소의 방문 교수직, 간학제적인 저널 「정보와 제어 Information and Control」의 편집자 직책, 그리고 MIT의 커뮤니케이션 과학 센터(Center for Communications Sciences)의 운영 위원회 위원직에 임명되었다. ( 48노암 촘스키Noam Chomsky와 MIT 공학자인 섀넌, 파노, 그리고 제롬 와이스너Jerome Wiesner는 야콥슨과 함께 같은 시기에 이 이사회에 임명되었다.) MIT 총장인 줄리어스 스트래턴(Julius Stratton)은 당시 초빙 석학 교수였던 야콥슨에게 보낸 1957년의 편지에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과 언어의 문제가 모든 현대 과학에서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귀하의 신념을 전적으로 공유합니다” 49라고 썼다. 야콥슨은 칭찬에 화답했다. 1960년 후반에, 그는 MIT 연구자들의 작업을 라캉과 레비-스트로스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 계속해 홍보하고 있음을, 그리고 동유럽에서 반-소비에트적인 학문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 냉전 활동을 지원하고 있음을 MIT 관리자들에게 확신시켰다. 50
야콥슨의 노력은 새로우면서도 영구적인 접근법을 확립했는데, 이는 언어적 행위를 데이터의 처리, 저장, 그리고 전송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접근법이었다. 발화의 덧없는 공시적 차원―고증학적 언어학에 대한 소쉬르의 비판에 핵심적이면서도 실험적 탐구 혹은 경험적 입증에 대해서는 독특하게 저항적인―은 정보 이론의 방법론에 따라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표현을 부여 받았다. 야콥슨은 1960년의 강의 “언어학과 시학 Linguistics and Poetics”에서 이런 노력들을 압축했는데, 여기서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범주들을 재개념화하기 위해 섀넌의 도식적인 커뮤니케이션 도표(그림3)를 전유했다. 이 결과로 나온 도표(그림4)는 공학자와 기기들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개발된 노동 분업과 개념적 분포에 따라 시학을 구상했다. 이런 점에서 섀넌의 도식은, 푸코의 다이어그램(diagrams)에 대한 설명에 들뢰즈(Deleuze)가 주석을 붙이면서 “권력을 구성하는 힘들 사이의 관계들의 표현” 51이라 묘사했던 것이었다. 이런 힘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에서 표현되었고, 여기서 섀넌은 기억에 남도록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지점에서 선별된 하나의 메시지를 한 지점에서 정확히 혹은 근사치에 가깝게 재생산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메시지는 흔히 의미를 가지곤 한다. 즉, 메시지는 특정한 물리적 혹은 개념적 개체를 나타내거나, 혹은 어떤 시스템에 따라 그 개체와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의 이런 의미론적 측면은 공학적 문제와 무관하다. 52
섀넌은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를,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도록 설계된 기술 시스템의 공학에 적합한 것으로 정의했다. 이런 작동들을 일련의 도식적인 활동들, 즉 그 작동을 특징짓는 방정식에 따라 각각 지정된 도식적인 활동들로 압축함으로써, 섀넌의 도표는 전문가적 특수성과 전문화된 기기의 기초를 형성한 일련의 새로운 기능들을 구상했다. 이 작업들의 분포는 인간과 기계 간의 노동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분포에 상응했다. “의미”를 배제함으로써 섀넌은 미국전신전화회사(the 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 Company)의 과제, 즉 발화를 관리, 유통, 및 복제를 위한 명확한 상품으로 확실하게 변환시키는 과제를 더 잘 구체화할 수 있었다. 섀넌의 도표가 가진 힘은 권력의 관계들을 동원하고 이 관계들을 여타 사회적 배치(assemblages)의 조직(tissue)에 투입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했다. 53
커뮤니케이션 공학의 도표적 전략은 언어학에 수입되자마자 언어-수행의 다루기 힘든 다양성에 일련의 질서정연한 분포와 계열을 부과했다. 따라서, 언어 자체는 커뮤니케이션 조립 라인 내부에서 경제적으로 분산된 일련의 기술적 작업들의 일부가 되었다. 야콥슨은 소쉬르의 기념비적인 개념인 랑그(la langue, 언어-시스템)와 파롤(la parole, 발화 혹은 화행)을 “코드”와 “메시지”로 재규정했다. 야콥슨의 이론에 따르면, 화자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코드를 참조해, 그 규칙에 따라 메시지를 구성한다. 특정한 사례에서, 스타일은 하위 코드(subcodes)에 따라 표현될 수 있다. 야콥슨의 제안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인문 과학적 지식이 생산될 수 있었다. 즉, 수학적 방법론에 의해 고무되고, 기술적 기기에 의해 개량되면서 제한되고, 전후 미국의 공학을 둘러싸고 축적된 풍부한 자원과 열망에 의해 힘을 얻게 된 지식 말이다. 언어학자들은 실험실에서 공학자들의 장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아이디어를 교차시키고 공유할 수 있었으며, 소쉬르가 남기고 간 무정형 영역의 비틀린 언어에 뛰어들어 그것을 현대적인 과학 프로그램 내부에 재장착할 수 있었다.
야콥슨과 그의 동료들은 언어적 행위를 기술경제적인 생산 매트릭스로 개조함으로써 언어학, 전자공학, 그리고 경제학의 전략적 결합을 위한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54벨 연구소의 산업적 방법론을 모델로 한 이런 접근법의 추종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와 동시에 일어난 전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형제애에 합류했다. 야콥슨은 어느 날 하버드 강의실에 들어와, 방금 강의실 사용을 마친 경제학자 바실리 레온티예프(Vassily Leontief)가 생산의 경제적 도표를 칠판에 남겨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다채롭게 설명했다. 야콥슨의 학생이 칠판을 지우려고 움직였을 때, 야콥슨은 “그만두세요, 이 도식을 가지고 강의할 거니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가 설명하길, “언어학과 경제학에서 산출(output)과 입력(input)의 문제는 정확히 동일한 것입니다.” 55
레비-스트로스의 사이버네틱스 입문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을 다룬 첫 기록은 파스의 1949년 9월의 일기장에서 시작된다. 파스는 “원래는 사이버네틱스와 언어학 연구의 관련성을 다룬 레비-스트로스의 논문을 접하기 위해” 56미국 연구자들의 컨퍼런스에 참여했다고 쓰고 있다. 불과 몇 달 전,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 구조 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1948)를 출간했는데, 여기서 그는 친족 관계가 음소의 관계와 유사하며, 따라서 친족 관계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한 양식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57전임 록펠러 연구원이기도 했던 수학자 앙드레 베유(Andre´ Weil)가 작성한 부록은 이런 관계들을 대수적으로 계산하려는 시도였다. 9월의 강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 결과들을 더 광범위한 구조주의적 관계의 이론으로 일반화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에 눈을 돌렸다.
레비-스트로스는 『사이버네틱스』에서 위너가 했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논의를 시작했는데, 이 주장은 사회과학이 사이버네틱스적인 분석을 위한 안정적이고 신뢰 가능한 데이터 세트를 결여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아마 영어에 대한 섀넌의 최근 통계 연구에서 단서를 얻었을 레비-스트로스는 반례로 문자 언어를 지목했다. 58레비-스트로스는 문자 언어를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그의 특유의 재독해, 즉 언어학, 경제학, 그리고 친족에 대한 구조적이고 사이버네틱스적인 재독해로 확장했다. 위버가 두 달 전에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Scientific American」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커뮤니케이션의 공학적 모델이 언어학, 경제적 거래, 친족의 원시적 체계 내부에서의 여성의 순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인간 활동의 영역들에 전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이런 활동들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적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이 시스템의 순환하는 요소들―음소, 재화, 그리고 아내―은 컴퓨팅 기계의 도움을 받아 수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59
레비-스트로스는 1950년 위버에게서 『커뮤니케이션의 수학적 이론』을 받고 야콥슨과 만남을 가진 이후에 사이버네틱스 장치가 가능케 한 유사성과 연합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사적으로, 그와 라캉은 사이버네틱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 수학자와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60공적으로, 그는 역사적 지체, 분과적 차이, 그리고 정치적인 이율배반이 가지고 있는 부식성 효과들을 극복할 수 있는 사이버네틱스의 능력이 가진 장점을 내세웠다. 가장 널리 읽힌 그의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에서, 그는 원시인 간의 증여(gift-giving)의 관습을 다룬 모스의 연구가 사실은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한 형식이며, 만약 이 연구가 정보 이론과 사이버네틱스에 숙달된 수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졌더라면 적절한 경험 연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61유네스코의 국제 사회과학 협의회의 회장이자 기술 변화의 사회적 함의에 관한 국제 연구소의 비공식적 리더로서, 62레비-스트로스는 논문을 출간했으며, 과학의 분과들, 민족 집단들, 그리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감수성을 분할했던 차이를 사이버네틱스 기기와 테크닉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폭넓게 강의했다. 63유네스코의 원조 아래 출간된 한 에세이에서, 그는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의 구절들을 유네스코 헌장에 삽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64여성, 경제적 재화, 그리고 언어의 순환을 연산적 분석(computational analysis)에 종속시키고자 제안했던 1949년의 강연과 비슷하게, 이런 제의는 전후 프랑스에서 논쟁의 여지가 많았던 공적 논의 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이었던 정치적 이슈들(젠더,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현대화, 제3세계와의 관계)을 추출하여 그 이슈들을 전문가의 결정을 위한 기술적 시스템 내부에 재기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 보였다. 65
레비-스트로스는 자연 과학자와 인문 과학자들의 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전자공학연구소 스타일의 실험실 혹은 센터를 설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지원을 받기 위해 유네스코와 록펠러 재단에 접근했다. 66레비-스트로스는 유네스코 저널에서 글을 쓰면서 “인문 과학의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자연 과학 및 정밀 과학에서처럼 가설을 경험적으로 검증할 실험을 실험실에서 착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선언했다. 그는 분과를 넘나들며 이론과 실천을 조직화할 수 있게 해주는 보더, 번역 기계, 그리고 여타 기기들의 능력을 환영했다. 이 기기들은 분과를 정체성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대신 분과의 다양성을 조화롭게 할 것이다. 그가 말하길, “생물학자, 언어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커뮤니케이션 공학자, 그리고 수학자들은 그들을 위한 공통 언어를 구성하는 가공할 만한 개념적 장치[appareil]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67
레비-스트로스는 추후에 MIT 전자공학연구소에 합류하게 되는 프랑스 정보 이론가 M. P. 쉬첸베르거(M. P. Schu¨tzenberger)에게 새로운 센터의 개발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951년 11월, 쉬첸베르거는 위너에게 연락해 프로젝트에 관해서 이렇게 편지를 남겼다.
매우 훌륭한 민족지학자인 레비-스트로스씨(뿐만 아니라 그는 앙드레 베유와 개인적인 친구입니다)가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음악, 심지어는 신화학 등에 응용하는 연구 센터를 설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수학적인 학문형성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굉장히 감수성 있는 사람이며 사이버네틱스를 가지고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지/없는지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신뢰한다는 말을 레비-스트로스씨가 들었기 때문에 그가 그 일을 어느 정도 저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68
(아마 자금 지원의 부족을 이유로)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센터를 설립하는 데 실패했는데, 이는 미래의 연구 방향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955년 즈음, 기기들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참조는 사이버네틱스적인 실험과 분석의 양식 그 자체로 구성된 혁신적인 시학으로 점차 대체되고 있었다. 69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간학제적인 세미나를 파리에서 조직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의 도움을 받아 CIA가 은밀히 자금을 지원하고 있던 사이버네틱스 연구 센터인 MIT의 국제연구센터(CENIS, Center for International Study)에서 2000달러를 확보했다. 70이전에 CIA의 국가 판단 부서장이었던 CENIS의 센터장 막스 밀리칸(Max Millikan)은 이 프로젝트에서 미국 과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센터의 국제 연구자 네트워크를 양성할 인상적인 기회를 발견해야만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 물리학자 피에르 오제(Pierre Auger), 수학자 조르주 테오뒬 귀보(Georges The´odule Guilbaud), 쉬첸베르거, 라캉 그리고 방브니스트(Benveniste)가 참여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세미나가 “친족과 집단 거래,” “공적 의견의 구조,”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으로서 여겨지는 정신분석학,”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특별한 형식으로서의 신화에 대한 연구” 71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간학제적인 연관성을 가진 주제들을 탐구할 것이라는 점을 약속했다.
1953년 5월, 레비-스트로스는 세미나의 진전을 보고하기 위해 야콥슨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당분간 우리는 몇 가지 문제들의 한계를 정하고 공통 언어를 찾기 위해 횡설수설하고 방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72라고 보고했다. 그는 야콥슨에게 감사를 표했는데, 왜냐하면 야콥슨이 할레와 체리와의 협동으로 준비한 러시아 음소에 대한 보고서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대한 최근 문헌의 서지목록을 그에게 보내줬기 때문이다. 모스의 충실한 제자답게, 레비-스트로스는 자신만의 선물로 화답했는데, 이는 자신이 발명한 이진 체계(그림5)에 따라 러시아 음소를 재분석한 것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내재적이고 자기-참조적인 양과 음의 패턴 체계에 따라 러시아 음소를 재분류했다. 그는 수평축을 따라서는 다양한 소리들을, 수직축을 따라서는 이 소리들이 가진 일련의 이분법적(either/or) 자질들을(모음성/자음성, 밀집성/비-밀집성 등), 표 내부에서는 그 특징들의 현존 혹은 부재를 나타내는 일련의 + 와 - 기호를 목록화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재분석이 가진 야망을 낮추어 보는 겸손함과 존경심을 가지고, “[제가 한] 모든 것들은 아마 의미가 없을 겁니다”라고 충고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 유일한 핑계거리는, 제가 저의 능력 밖인 언어학 용어들을 기호로 대체했다는 점, 그리고 이 것들이 순수한 기호 조작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73추상적인 기호 조작으로의 이행은 커뮤니케이션을 기호 조작과 재현에 대한 비의미론적인 설명으로 제한시킴으로써 구조주의로 하여금 위너와 섀넌의 작업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실험실이나 기계 없이도 그가 가지고 있던 연필을 사이버네틱스 장치의 일부로 전환시켰다. 74
연구원 세미나의 참가자인 라캉도 사이버네틱스적 기입의 피드백 루프 내부에서 선회했다. 다음 해, “도둑맞은 편지 Purloined Letter”에 대한 기념비적인 세미나에서 라캉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이야기에 나오는 게임을 사이버네틱스 오토마톤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75라캉이 이름을 거론하기를 꺼려했던 이 오토마톤의 이름은 SEquence Extracting Robot(시퀀스 추출 로봇)의 줄임말인 SEER였다. 벨 연구소의 데이비드 하겔바거(David Hagelbarger)가 섀넌과 협력해 이 기계를 개발했다. 76라캉은 홀/짝 중 인간 플레이어가 무엇을 선택할지 추측하기 보다는, 하겔바거의 기계가 +/- 중 인간 플레이어가 무엇을 선택할지를 예측해냈던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은 난수(random numbers)를 생성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기계는 놀라운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 하겔바거는 인간을 기계에 의해 쉬이 처리되는 일련의 기호들로 끌어들임으로써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패턴화되어 있고 예측가능한지를 극적으로 증명해냈다.
라캉은 인간의 상호작용이 비개인적이고 비주관적인 상징적 질서에 의해 구조화된다는 증거로서 그 기계와 그 기계가 불러온 결과를 소환했다. 언제나 쇼맨이었던 라캉은 수업 중에 시범을 보였다. 라캉은 문자 언어를 최신 기술로 재매개한 SEER를 저렴하면서 저차원적인 기술로 탈매개하면서 두 수강생에게 연필과 종이를 건넸다. 그는 두 수강생에게 일련의 +,- 기호를 빠르게 적어서 내라 권하였으며, 이것은 추후에 통계적 분석에 회부되었다. 77학생들은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라캉은-역자 추가) 미국 컴퓨팅 기계가 (수업 내에-역자 추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사이버네틱스 장치가 이미 정신분석학의 핵심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그 기계의 작동과 상징들로 수업 내의 활동을 구조화하는 것만으로 제공했어야만 했다.
확산과 불만
1950년대 중반까지 사이버네틱스 장치는 그것이 가교를 놓으려고 의도했던 국가적 전통 및 분과적 전통의 무게 아래에서 긴장의 징후를 보였다.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이 사이버네틱스를 탐구하는 동안, 사이버네틱스와 구조주의 언어학을 혼합했던 야콥슨의 미국적 실험은 불안정해졌다. 전자공학 연구소에서, 노암 촘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동료는 자연어가 정보이론적 프로세스로 모델링될 수 있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했는데, 이는 체리와 할레와 함께 한 야콥슨의 연구에 큰 타격을 주었다. 78할레는 정보 이론을 자연어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포기했으며, 수 년 후에 체리는 그 프로젝트가 헛걸음이었음을 시인했다. 79체리의 책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On Human Communication』(1957)의 출간을 제외하면, MIT 출판사와 함께한 야콥슨의 도서 시리즈는 결코 결실을 맺지 못했다. MIT 관리자들은 1962년 즈음에 간학제적인 커뮤니케이션 과학 센터를 위한 계획을 포기했다. MIT 80에 있었던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와 컴퓨터 과학자 조셉 와이젠바움(Joseph Weizenbaum)은 자연어를 확률적인(stochastic) (정보-이론적) 과정으로 모델링하려는 동료의 시도들에 맞서 비판을 시작했다. 때로는 짜증에 가까웠던 그들의 불만은 계속 확장되어가는 사이버네틱스의 주장에 대한 광범위한 권태감과 도덕적 불안을 결정화했다. 81
레비-스트로스 또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1952년 뉴욕시에서 한 발표인 “사회적 구조 Social Structure” 82―사이버네틱스를 등에 업은 구조주의를 위한 레비-스트로스의 선언―가 끝나고 나서, 미국 과학자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사이버네틱스를 다룬 메이시 회의(Macy Conferences)의 창립 멤버였던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이 위너와 자신의 공동 작업과는 상충한다고 요령 있게 언급했다. 83철학자이자 메이시 회의 참가자인 F. S. C. 노스롭(F. S. C. Northrop)은 발표의 다른 참석자였던 야콥슨에 대한 논박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단일하고 고도로 정제된, 또한 그 자체가 서구적인 과학 문화의 산물인 수학적 방법론에 따라 모든 문화를 특징지으려는 시도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다. 84한편, 해외의 프랑스 맑스주의자들은 초기 구조주의 운동을 미국의 기술관료적인 제국주의의 대리자라고 공격했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맑스주의와 정보이론 Marxism and the Theory of Information”(1958)에서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을 비웃었는데, 이 주장은 전신(telegraph)의 전송을 측정하는 테크닉이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배열들을 이해하는 초역사적인 절차를 규정해주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와 정보이론이 “정보 기계 내에서, 그리고 정보 기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구조를 지속시키고 강화하는 장치[dispositifs]의” 85과학이라며 경멸적인 딱지를 붙였다. 다른 말로 하면, 르페브르는 구조주의자들이 인공적이고 우발적인 기계의 구조를 존재론의 견지에서 설명하며 일반화한다고 제안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맑스주의적 비판에 대응하여, “과학적 발견은 미국과 등지에서 너무 빈번하게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용도로 사용되고는 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이 용도로부터 과학적 발견을 구분하는” 86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에 존재하는 반대론자들의 이의제기는 다루기 힘든 부조화(incongruity)를 강조했는데, 이는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는 이상적이고, 동질적이고, 과학-기술적인 진취로서 “커뮤니케이션”을 정의하려는 레비-스트로스의 시도와, 커뮤니케이션을 진행시키는 장소, 공동체, 및 미디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도로 정치화된 문제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현실 간의 부조화였다.
1962년 『야생의 사고』의 프랑스 출간과 함께, 레비-스트로스는 10여 년에 걸친 사이버네틱스 실험을, 토착 문화에서의 토템적 관습이 가진 정보적 특성에 대한 철학적으로 암시적이면서 시적이기까지 한 애가로 세공해냈다. 보더(Voder) 혹은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레비-스트로스는 정보 이론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아끼지 않았다. 지적인 종결부(coda)로 여겨질 수 있는 것에서, 사이버네틱스 기계에 대한 그의 이전의 열병은 분석과 글쓰기의 규율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이 규율은 기이하고도 낯선 실천들을 일련의 간단한 패턴과 코드로, 즉 커뮤니케이션과 같이 선을 따라 반복 및 순환하는 패턴과 코드로 환원하는 규율이었다. 이런 점에서, 『야생의 사고』가 가지고 있는 걸작으로서의 지위는 『야생의 사고』의 불충실(infidelity), 즉 정보 이론에 대한 훌륭한 오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 오독은 문화를 동적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으로 새롭게 해석하자고 제안하는데, 이 시스템 내부에서 언어, 여성, 식물, 사냥 과정, 그리고 경제적인 실천들은 이해가능성과 추론의 내재적 가능성을 구성하기 위해 서로 간에 순환한다.
사이버네틱스 장치의 사후(死後)
1960년대 중반까지 사이버네틱스 장치는 마모되어갔다. 미국에서, 사이버네틱스의 보편적 주장에 대한 과학자들의 열광은 사이버네틱스 지지자들의 통제되지 않은 자만심에 대한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록펠러 재단은 자신의 노력의 방향을 다른 이니셔티브를 향해 돌려 버렸고, 보더는 1930년대 연극 소품이 그랬던 것처럼 벨 연구소의 창고에 방치되었다. 정보 이론의 대중화에 맞서 섀넌과 여타 공학자들이 공적인 비판을 감행한 이후에, 이 분야는 전문화된 수학적 분석에 집중하는 공학자들에게로 그 대형이 좁혀졌다. 87사이버네틱스와 그 설립자인 위너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88야콥슨의 관심은 분자 생물학으로 옮겨갔다. CIA는 1960년대에 포드 재단(Ford Foundation)과 미국 사이버네틱스 협회(American Society for Cybernetics)를 통해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이 분야를 소생시키고자 했으나, 미국의 사이버네틱스는 빈사 상태로 남았다. 89
대서양을 건너 다른 사이버네틱스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는 한때 사이버네틱스 장치가 배치했던 관계들에 내재되어 있던 이해가능성과 이성의 다른 가능성이라 불렸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1960년대, 「텔 켈 Tel Quel」이나 「코뮤니카시옹 Communications」지와 연계되어 있던 프랑스 비평가들은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의 사이버네틱스 구조주의의 요소들을 채택해 그것을 프랑스 맑스주의적인 비평들에 통합시켰다. 이 결과는 프랑스 기호학이었는데, 과학적 의미와 예술적 의미 모두에서 실험적이었던 이 글쓰기 양식은 커뮤니케이션 과학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틀을 주제화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적인 비유와 문제계를 이용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961년의 에세이 “사진의 메시지 Le Message photographique”에서,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의 새로운 방법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야콥슨과 섀넌의 도식적 설명을 재해석했다. 그가 말하길, “모든 [기호적] 코드는 모호한 동시에 합리적이다. 따라서, 코드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 자신을 증명하고, 이성과 자유를 통해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이런 점에서, 코드에 대한 분석은 아마 코드의 시니피에(signifieds)에 대한 분석보다 더 쉽고 확실하게 사회에 대한 역사적 정의를 가능케 해줄 것이다.” 90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De la grammatologie』(1967)에서, 인문과학과 사이버네틱스 간의 “비우연적인(nonfortuitous)” 접속(conjunction)은 서구 과학이 어떻게 자신의 로고스를 탈구축하는 과정에 있었는지에 대한 동시대적 구체화였다고 제안했다. 91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모델에 대한 위너의 연구를 인용했는데, 이 연구는 “과학 비판(critique of science),” 그리고 특히는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질서 있는 모델로 진정시키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시공간에 놓이게 될 “비판 과학(science of critique)”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원으로서 인용되었다. 92들뢰즈,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 그리고 푸코를 포함한 다수의 여타 전후 철학자들은 인코딩(encoding), 디코딩(decoding), 코드, 정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같은 용어들을 가지고 아이러니한 실험을 함으로써 합세했다. 그들이 이런 용어들을 이용한 것은, 정치에서 과학으로 도피하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글쓰기를 하나의 실험적 체계, 즉 과학적 담론과 커뮤니케이션의 정치와 역사성을 탐구하기 위한 체계로 변환시키는 것이었다. 93
이것은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대한 두 번째의 사망 선고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미국산 비극으로서, 그 다음으로는 프랑스산 소극으로서 말이다. 1960년대 후반까지, 워렌 위버의 꿈, 즉 “비개인적이고 사심 없는 관심과 이해를 통합하는 유대를 가지고 있는 전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형제애”의 꿈은 사이버네틱스의 언어와 도구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부 이론들은 사후에 태어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이 프랑스 기호학에 주었던 사이버네틱스라는 선물은 천천히 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바르트의 『S/Z』(정보의 인코딩과 디코딩에 대한 찬사) 94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The Postmodern Condition』(정보-기반 사회에 대한 비관적 설명)과 같은 텍스트를 통해, 미국의 학자들은 프랑스 동료들로부터 텍스트, 문화, 그리고 사회 전체를 사이버네틱스 코드의 경합하는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이 “적의 존재론”이라 이름붙인 것, 즉 2차 대전의 분쟁에 토대를 둔 사이버네틱스 존재론은 과학 출판물과 대중 출판물에서 “문화 전쟁” 및 “과학 전쟁”이라 불린 기묘한 새로운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 95프랑스 이론” 내의 과학에 대한 비판적 설명에 찬사를 보낸 미국인들은, 저자들이 커뮤니케이션 과학의 구조주의적인 환상 및 냉전의 환상과 맺은 아이러니한(심지어 때로는 동경하거나 향수를 느꼈던) 관계들을 종종 무시했다. 96한편, 반대자들은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를 과학의 생명력을 위협하는 위험한 기생충이라며 조소했다. 97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악명 높은 장광설인 『지적 사기 Intellectual Impostures』에서, 앨런 소칼(Alan Sokal)과 장 브리크몽(Jean Bricmont)은 과학적 용어를 경솔하게, 그리고 정치적으로 포용해 그 용어를 비과학적인 문제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 프랑스 이론가들을 비난했다. 두 저자는 명백하게, 전후 시기 과학과 정치가 인문과학에 부과된 방식에 대해 무지했다. 98프랑스 신문 르 몽드에 실렸던, 소칼과 브리크몽에 대한 응답에서, 데리다는 이렇게 논평했다.
미국에서 … 저는 처음에, 특히 신문에서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적 중 하나였습니다. … 왜냐하면 그들은 외국인 교수의 터무니없고 번거로운 “신용(credit)”을 떨어트리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제가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면의 한계상 여기서[르몽드에서] 다루기 시작할 수 없는 더 광범위한 맥락―미국의 맥락과 정치적 맥락―입니다. … 이 작업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바라건대 품위를 가지고 계속될 것입니다.
데리다의 생략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논평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바로 그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미디어적이고, 과학적이고, 정치적인 구조가 그들의 주장을 조건 짓고 그(데리다-역자 추가)의 응답을 제약했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연기(deferral)를 감수한 그는, 대화가 다른 곳에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기를 희망한다고 표현했다. 99
그러한 방향으로의 한 걸음은 프랑스 이론을 외국 기생충으로 보는 생각을 제쳐 두고, 프랑스 이론을 해외에서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탕아로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디지털 장치를 통해 인문과학의 담론과 방법론을 쇄신하려는 동시대적 노력에서 어떤 종류의 역사적, 정치적인 구조가 인식되지 못한 채로 귀환하는지를 성찰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여기를 보라. Claude Le´vi-Strauss, The Savage Mind (Chicago, 1962). 여기서부터는 SM으로 줄여 부르고자 한다. 책을 통틀어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 문화가 코드, 메시지, 그리고 전달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267–69 페이지를 보라. (역자-원서 기준 페이지이다.) (한국어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역, 한길사, 1996년)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La Pense´e sauvage (Paris, 1962), p. 356.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James L. Massey, “Deep-Space Communications and Coding: A Marriage Made in Heaven,” in Advanced Methods for Satellite and Deep Space Communications: Proceedings of an International Seminar Organized by Deutsche Forschungsanstalt fu¨r Luft- und Raumfahrt (DLR), Bonn, Germany, September 1992, ed. Joachim Hagenauer (Berlin, 1992), pp. 1–17. [본문으로]
- 로만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록펠러 재단과 MIT의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역사적으로 특정한 인식론적 형성물을 좀 더 정확히 지칭하기 위해, 필자는 인문학과 사회 과학(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보다는 좀 더 대륙철학적 용어인 인문 과학(human sciences)을 사용한다. (프랑스어: les sciences humaines; 독일어: Geisteswissenschaften) 인문과학이라는 용어와 그 용어의 프랑스어, 독일어 등가물은 또한 연구의 인문학적이고, 정신적이고, 과학적인 측면들이 어떻게 뒤섞이는지에 대한 유용한 연상물을 제공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 분과를 넘나들며 연구를 통합하는 “중립적인” 개념 틀로서, 사이버네틱스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발전한 것에 대해선 여기를 보라. Steve Heims, The Cybernetics Group (Cambridge, Mass., 1991); Geof Bowker, “How to Be Universal: Some Cybernetic Strategies, 1943–70,” Social Studies of Science 23 (Feb. 1993): 107–27; Slava Gerovitch, From Newspeak to Cyberspeak: A History of Soviet Cybernetics (Cambridge, Mass., 2002); and Michael Hagner, “Vom Aufstieg und Fall der Kybernetik als Universalwissenschaft,” in Die Transformation des Humanen: Beitra¨ge zur Kulturgeschichte der Kybernetik, ed. Hagner and Erich Hörl (Frankfurt am Main, 2008), pp. 38–71. [본문으로]
- 사이버네틱스의 전략적 측면, 특히 사이버네틱스의 은밀한 군사주의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Peter Galison, “The Ontology of the Enemy: Norbert Wiener and the Cybernetic Vision,” Critical Inquiry 21 (Autumn 1994): 228–66; Paul N. Edwards, The Closed World: Computers and the Politics of Discourse in Cold War America (Cambridge, Mass., 1996); and Jennifer S. Light, From Warfare to Welfare: Defense Intellectuals and Urban Problems in Cold War America (Baltimore, 2003), pp. 55–91. [본문으로]
- dispositif에 대한 가장 긴 푸코의 논의인, “Le Dispositif de sexualite”라는 제목이 붙은 챕터는 『Histoire de la sexualite´ 1: La Volonte´ de Savoir』(프랑스, 1976, 99–173 페이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영문 번역은 로버트 헉슬리의 번역 3판인 『The History of Sexuality』(뉴욕, 1978)를 참조하라. (한국어판: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 이규현 역, 나남출판, 2020년) 최근의 번역가들은 apparatus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안전장치에 대한 논의는 여기를 보라. Foucault, Security, Territory, Population: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7–1978, trans. Graham Burchell, ed. Michael Senellart (New York, 2007, pp. 6–23) (한국어판: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역, 난장 출판사, 2011) 또한 여기를 보라. Foucault, “The Confession of the Flesh,”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trans. Colin Gordon et al., ed. Gordon (New York, 1980), esp. pp. 194–98. 이 용어에 대해 도움이 되는 논의는 여기를 보라. Frank Kessler, “Notes on Dispositif” (2006), www.let.uu.nl/ꠑFrank.Kessler/personal/notes%20on%20dispositif.pdf.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Foucault, “The Confession of the Flesh,” pp. 194–98. [본문으로]
- 영화학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 논의로는 여기를 보라. Jean-Louis Baudry, “Ideological Effects of the Basic Cinematographic Apparatus,” in Narrative, Apparatus, Ideology: A Film Theory Reader, trans. Alan Williams, ed. Philip Rosen (New York, 1986), pp. 286–98. (한국어판: 장-루이 보드리, 기본적 영화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역, 문학과 지성사, 2011) 인쇄된 책의 “고정성”이 합리적, 과학적 지식의 조건 혹은 특성으로 구축되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Adrian Johns, The Nature of the Book: Print and Knowledge in the Making (Chicago, 1998), pp. 628–37. [본문으로]
- 이런 점에서 현 논문은 다음의 텍스트에서 취해진 분석을 확장하고 다시 틀 짓는다. Gilles Deleuze, “What Is a ‘Dispositif’?” Michel Foucault, Philosopher, trans. and ed. Timothy Armstrong (New York, 1992), pp. 159–68 (한국어판: 질 들뢰즈, 「장치란 무엇인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역, 이학사, 2007년), Giorgio Agamben, “What Is an Apparatus?” and Other Essays, trans. David Kishik and Stefan Pedatella (Stanford, Calif., 2009), pp. 1–24 (한국어판: 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양창렬 역, 난장 출판사, 2006년)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John Johnston, The Allure of Machinic Life: Cybernetics, Artificial Life, and the New AI (Cambridge, Mass., 2008), pp. 65–103; and Lydia H. Liu, “The Cybernetic Unconscious: Rethinking Lacan, Poe, and French Theory,” Critical Inquiry 36 (Winter 2010): 288–320. 두 텍스트 모두 “‘도둑밪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에서의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라캉의 논평을 상세하게 설명하고는 있지만, 라캉의 논평에 영향을 주었으며 클로드 섀넌과 데이비드 하겔바거가 만든 유명한 사이버네틱스 오토마타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의하기보다는 라캉의 논평의 기원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변한다. 구체적 기기들(appareils)에 대한 이런 무시는, 라캉에게 사이버네틱스를 소개했던 전략적, 역사적, 그리고 제도적인 배열들, 즉 CIA와 록펠러 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은 연구 프로그램(아래에서 논의할 것이다)을 상당 부분 간과하는 것으로 덧붙여진다. 기기와 배열들에 대한 이런 생략은 기술을 글쓰기의 형상으로 축소하는 문학 연구와 철학에서 좀 더 일반적인 경향의 전형이다. 이런 경향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Mark Hansen, Embodying Technesis: Technology beyond Writing (Ann Arbor, Mich., 2000) 사이버네틱스 역사 기술에 있어 이런 경향에 대한 주목할 만한 예외는 여기를 보라. Lily E. Kay, Who Wrote the Book of Life? A History of the Genetic Code (Stanford, Calif., 2000), esp. pp. 294–325.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Ronan Le Roux, “Le´vi-Strauss, une re´ception paradoxale de la cyberne´tique,” L’Homme 189 (Jan.–Mar. 2009): 165–90. 또한 여기를 보라. Ju¨rgen Van de Walle, “Roman Jakobson, Cybernetics and Information Theory: A Critical Assessment,” Folia Linguistica Historica 29 (Dec. 2008): 87–123.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적 인류학과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세세하고 비교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Christopher Johnson, Claude Le´vi-Strauss: The Formative Years (New York, 2003), esp. pp. 93–97. 필자는 텍스트뿐 아니라 필자에게 도움이 되는 제안을 해준 존슨에게 특별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본문으로]
- 특히 여기를 보라. Je´roˆme Segal, Le Ze´ro et le un: Histoire de la notion scientifique d’information au 20e sie´cle (Paris, 2003), and Ce´line Lafontaine, L’Empire cyberne´tique: Des machines a` penser a` la pense´e machine (Paris, 2004). 전자의 책이 정보의 형상을 둘러싼 글로벌 지식의 공고화를 상찬한다면, 후자의 책은 그것을 글로벌 억압의 증거로서 규탄한다. [본문으로]
- 이 광범위한 문헌은 여기서는 오직 선별적으로만 제시될 수 있다. 사이버네틱스 자체에 내재한 다양성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Ronald Kline, “Where Are the Cyborgs in Cybernetics?” Social Studies of Science 39 (June 2009): 331–62 and “The Disunity of Cybernetics,” unpublished talk; and Claus Pias, “Zeit der Kybernetik,” in Cybernetics - Kybernetik 2: The Macy-Conferences 1946–1953, ed. Claus Pias, 2 vols. (Berlin, 2004), 2:9–41. 정보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사이버네틱스 내부에서의 문제계의 이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N. Katherine Hayles, How We Became Posthuman: Virtual Bodies in Cybernetics, Literature, and Informatics (Chicago, 1999), pp. 50–83 and 131–59. (한국어판: N.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허진 역, 열린책들, 2013년) 그리고 특히 정보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Hansen, New Philosophy for New Media (Cambridge, Mass., 2004), pp. 47–92. 사이버네틱스 내부에서의 과학적 힘, 군사적 힘, 반문화적 힘의 교차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Fred Turner, From Counterculture to Cyberculture: Stewart Brand, the Whole Earth Network, and the Rise of Digital Utopianism (Chicago, 2006), and Andrew Pickering, The Cybernetic Brain: Sketches of Another Future (Chicago, 2010). 사이버네틱스의 다양한 기원과 배치들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David A. Mindell, Between Human and Machine: Feedback, Control, and Computing before Cybernetics (Baltimore, 2002); Philip Mirowski, Machine Dreams: Economics Becomes a Cyborg Science (Cambridge, 2002); Orit Halpern, “Dreams for Our Perceptual Present: Temporality, Storage, and Interactivity in Cybernetics,” Configurations 13 (Spring 2005): 283–319; and Eden Medina, Cybernetic Revolutionaries: Technology and Politics in Allende’s Chile (forthcoming). 사이버네틱스의 다양성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묘사는 두 권의 선집으로 이루어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Die Transformation des Humanen and Pias, Cybernetics - Kybernetik 2.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Mark Dowie, American Foundations: An Investigative History (Cambridge, Mass, 2001), esp. pp. 27–28, 56–57, and 107, and Edward H. Berman, The Ideology of Philanthropy: The Influence of the Carnegie, Ford, and Rockefeller Foundations on American Foreign Policy (Albany, N.Y., 1983), pp. 11–40. [본문으로]
- Warren Weaver, “The Benefits from Science—Science and Foundation Program—The Proposed Program,” 27 Jan. 1933, Rockefeller Foundation Collection, record group 3.1, series 915, box 1, folder 6, Rockefeller Archive Center (RAC), Sleepy Hollow, New York.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Steven Shapin and Simon Schaffer, Leviathan and the Air-Pump: Hobbes, Boyle, and the Experimental Life (Princeton, N. J., 1985). [본문으로]
- 필자는 이런 통찰을 다음에 빚지고 있다. John P. McCormick, Carl Schmitt’s Critique of Liberalism: Against Politics as Technology (New York, 1997). 슈미트의 정치적 글들에 대한 맥커믹의 설명은 미디어, 과학, 기술사가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희망컨대 슈미트의 작업에 대한 광범위한 참여를 촉진시킬 것이다. [본문으로]
- 사회적 기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보라. “Social Technology,” 1927, in “Program and Policy—Reports—Pro 1–4—1914, 1927,” record group 3.1, series 910, box 2, folder 10, RAC. 그리고 공학적 은유와 관련해서는 여기를 보라. Raymond Fosdick, The Story of the Rockefeller Foundation (New York, 1952), p. 194. [본문으로]
- 이런 프로그램들이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록펠러의 자금지원을 받은 프린스턴대의 라디오 연구가 가진 행정적 취지에 대해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폴 라자스펠트와 원한에 가득 찬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다양한 방법론과 공동체를 통합하고 그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게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본문으로]
-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내에서 이 시기 동안 록펠러 재단의 의제들이 직조된 것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Kay, The Molecular Vision of Life: Caltech, the Rockefeller Foundation, and the Rise of the New Biology (New York, 1993), pp. 22–57. 록펠러의 자금 지원을 받은 미디어 연구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Brett Gary, “Communication Research, the Rockefeller Foundation, and Mobilization for the War on Words, 1938–1944,” Journal of Communication 46 (Summer 1996): 124–48. [본문으로]
- Raymond Fosdick, “President’s Review,” in The Rockefeller Foundation Annual Report: 1936 (New York, 1937), p. 42. [본문으로]
- 학자들의 유럽으로의 귀환에 대한 계획과 관련해서는 여기를 보라. the records of a meeting between Rockefeller officers and Alvin Johnson of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19 Sept. 1941, folder “Launching/Inauguration of the Ecole Libre,” box 3 of the Ecole Libre Papers,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Library, New York City. 이런 프로그램들의 전략적 설계에 대한 더 일반적인 개관으로는 여기를 보라. The “Unacceptables”: American Foundations and Refugee Scholars between the Two Wars and After, ed. Giuliana Gemelli (Brussels, 2000). [본문으로]
- Fosdick, The Story of the Rockefeller Foundation (New Brunswick, N.J., 1989), p. 245. [본문으로]
- 이후, 야콥슨은 그의 강의 중 하나를 개정해 그것을 다음과 같이 출간했다. Roman Jakobson, Six Lectures on Sound and Meaning, trans. Mepham (Cambridge, Mass., 1978). 레비-스트로스가 쓴 서문은 자기자신과 다른 수강생들에게 이 강의의 배경과 중요성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제공한다. [본문으로]
- 같은 책. 특히 23-43쪽을 보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언어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Jakobson, “Efforts toward a Means-Ends Model of Language in Interwar Continental Linguistics,” On Language, ed. Linda R. Waugh and Monique Monville-Burston (Cambridge, Mass., 1990), p. 58. [본문으로]
- Ferdinand de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trans. Wade Baskin, ed. Charles Bally and Albert Sechehaye, (New York, 1959), p. 41. (한국어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김현권 역, 그린비, 2022년) [본문으로]
- 같은 텍스트. [본문으로]
- Jakobson, Six Lec¸ons sur le son et le sens (Paris, 1976), p. 34. [본문으로]
- 1944년과 1946년에 개최된 행사의 초청 카드와 발표 내용은 여기에서 보라. Jakobson’s file on the Linguistic Circle of New York, box 6, folder 74, Jakobson Papers (RJP), MIT Archives, Cambridge, Mass. [본문으로]
- 그의 전시 프로파간다 작업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Stephen Rudy, “Jakobson et Le´vi-Strauss a` New York (1941–1945), and Those Infamous Cats,” in Claude Le´vi-Strauss, ed. Michel Izard (Paris, 2004), pp. 120–24. 그의 이웃으로서의 섀넌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and Didier Eribon, Conversations with Claude Le´vi-Strauss, trans. Paula Wissing (Chicago, 1991), p. 30. [본문으로]
- Le´vi-Strauss, “Introduction: Les Mathe´matiques de l’homme,” Bulletin International des Sciences Sociales 6, no. 4 (1954): 644. [본문으로]
- 찰스 B. 파스는 언어학에 대한 글로벌한 재평가라는 맥락에서 찰스 하킷과 에밀 방브니스트 역시 포함시켰다. 한편, 세벅은 미 국무부의 컨설턴트 자리를 수락했다.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대사관과 유네스코의 직책을 수락했다. [본문으로]
- Jakobson, letter to Fahs, 9 Oct. 1948, box 6, folder 37, RJP. [본문으로]
- 보고문의 일부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Jakobson, “Current Issues of General Linguistics,” On Language, pp. 56–60. [본문으로]
- Jakobson, letter to Weaver, 14 Feb. 1950. box 6, folder 37, RJP. [본문으로]
- Jakobson, letter to Fahs, 19 Dec. 1949, box 6, folder 37, RJP. [본문으로]
- Jakobson, letter to Fahs, 22 Feb. 1950, box 6, folder 37, RJP. [본문으로]
- 같은 텍스트. [본문으로]
- The Rockefeller Foundation: Annual Report 1951 (New York, 1952), p. 78 [본문으로]
- 같은 텍스트., p. 9. [본문으로]
- Weaver, letter to Jakobson, 24 Feb. 1950, box 6, folder 37, RJP. RAC에서 있었던 야콥슨과 위버 간의 서신 교환 또한 보라. [본문으로]
- “Preliminary Report on Roman Jakobson’s European Trip,” c. July 1950, Rockefeller Foundation Collection, record group 1.2, series 200R, box 370, folder 3323, RAC.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E. Colin Cherry, Morris Halle, and Jakobson, “Toward the Logical Description of Languages in Their Phonemic Aspect,” Language 29 (Jan.–Mar. 1953): 34–46. [본문으로]
- Jakobson, “Results of a Joint Conference of Anthropologists and Linguists,” in Selected Writings II: Word and Language (Paris, 1971), p. 556; hereafter abbreviated RJ.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Norbert 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 (Boston, 1950), pp. 187–93. (한국어판: 노버트 위너, 『인간의 인간적 활용』, 이희은, 김재영 역, 텍스트, 2011년)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box 50, folder 29, RJP. [본문으로]
- MIT 교수진 합류 초청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Stratton, letter to Jakobson, 28 Mar. 1957, box 3, folder 67, RJP. 「정보와 제어 Information and Control」 편집 위원 합류 초청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Wiesner, letter to Jakobson, 29 May 1956, box 50, folder 29, RJP. 커뮤니케이션 과학 센터 합류 초청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Stratton, letter to Jakobson, 2 Dec. 1957, box 3, folder 63, RJP. [본문으로]
- Stratton, letter to Jakobson, 28 Mar. 1957, box 3, folder 67, RJP.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Jakobson, letter to Wiesner, 23 Nov. 1960, Jerome Wiesner Papers, box 9, folder 284, MIT Archives, Cambridge, Mass. [본문으로]
- Deleuze, Foucault, trans. and ed. Sea´n Hand (Minneapolis, 1988), p. 36. (한국어판: 질 들뢰즈, 『푸코』, 허경 역, 그린비, 2019년) [본문으로]
- Claude Shannon, 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 (1948; Urbana, 1964),p. 31. (한국어판: 워런 위버, 클로드 섀넌, 『수학적 커뮤니케이션 이론』, 백영민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년)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Deleuze, Foucault, p. 37. (한국어판: 질 들뢰즈, 『푸코』, 허경 역, 그린비, 2019년) [본문으로]
- 지식과 권력을 정보의 선에 따라 재편한 것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은 여기에 있다. James R. Beniger, The Control Revolution: Technological and Economic Origins of the Information Society (Cambridge, 1986) (한국어판: 제임스 R. 베니거, 『컨트롤 레볼루션』, 윤원화 역, 현실문화, 2009년.) 기호학의 맥락에서는, 여기를 보라. Donna Haraway, “The High Cost of Information in Post-World War II Evolutionary Biology: Ergonomics, Semiotics, and the Sociobiology of Communications Systems,” Philosophical Forum 13 (Winter/Spring 1981–82): 244–78. [본문으로]
- 여기에 인용되어 있다. Slava Gerovitch, “Roman Jakobson und die Kybernetisierung der Linguistik in der Sowjetunion,” in Die Transformationen des Humanen: pp. 243–44. 영어 원문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게로비치에 감사를 드린다. 게로비치의 텍스트는 굉장히 훌륭한 디테일로 야콥슨이 섀넌의 이론을 재개념화한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본문으로]
- Fahs, entry for 8 Sept. 1949, diary, record group 2, series 500R, box 483, folder 3104, RAC. 레비-스트로스는 이따금 자신의 경력을 통틀어 이름의 철자를 바꾸곤 했다. 따라서, 파스가 이름의 철자를 “Levy-Strauss”라 한 것은 그 당시에는 아마도 맞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 Le´vi-Strauss, 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trans. James Harle Bell, James Richard von Sturmer, and Rodney Needham, ed. Needham (Boston, 1969), pp. 493–97.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Fahs, diary, entry for 8 Sept. 1949. [본문으로]
- 같은 텍스트. 컴퓨팅 기계에 대한 코멘트는 공개된 버전의 대담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Language and the Analysis of Social Laws,” Structural Anthropology (New York, 1976), pp. 57–58.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Mai Wegener, “An der Straꠑenkreuzung, der Mathematiker Georges The´odule Guilbaud: Kybernetik und Strukturalismus,” Archiv fu¨r Mediengeschichte 4 (Oct. 2004): 167–74, and Le Roux, “Psychanalyse et cyberne´tique: Les Machines de Lacan,” L’Evolution Psychiatrique 72 (Apr.–Jun. 2007): 346–69.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Introduction to the Work of Marcel Mauss, trans. Felicity Baker (London, 1987), pp. 42, 70 n. 13. (한국어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박정호, 박세진 역, 파이돈, 2023년)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Denis Bertholet, Le´vi-Strauss (Paris, 2003), pp. 211–13, and Frederic C. Lane, entry for 23 Mar. 1954, diary, record group 2, series 500R, box 44, folder 297, RAC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Les Mathe´matiques de l’homme,” esp. pp. 650 and 653.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The Place of Anthropology in the Social Sciences,” Structural Anthropology, p. 380 n. 10. [본문으로]
- 전후 프랑스에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긴장을 관리하기 위해 기술적이고, 과학적이고, 산업적인 형상과 기술들을 배치한 것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Kristin Ross, Fast Cars, Clean Bodies: Decolonization and the Reordering of French Culture (Cambridge, Mass., 1995). [본문으로]
- Norman S. Buchanan, entry for 17 Sept. 1949, diary, record group 2, series 500R, box 483, folder 3104, RAC. [본문으로]
- Le´vi-Strauss, “Introduction: Les Mathe´matiques de l’homme,” pp. 644–45. [본문으로]
- Schu¨tzenberger to Wiener, 10 Nov. 1951, folder 143, Norbert Wiener Papers, MIT Archives. [본문으로]
- 이 점에 대해서는 한스-외르크 라인베르거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는 필자에게 글쓰기 실천 또한 실험적 체계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주었다. [본문으로]
- Lenneberg, letter to Le´vi-Strauss, 15 Jan. 1953, Nov. 1952, box 50, folder 29, RJP. CENIS의 CIA 관련 활동과 커뮤니케이션 관련 활동에 대해 더 보고 싶다면, 여기를 보라. Light, From Warfare to Welfare, p. 166, and Alan A. Needell, “Project Troy and the Cold War Annexation of the Social Sciences,” in Universities and Empire: Money and Politics in the Social Sciences during the Cold War, ed. Christopher Simpson (New York, 1998), pp. 3–38.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letter to Millikan, 7 Jan. 1953, box 50, folder 29, RJP. [본문으로]
- Le´vi-Strauss, letter to Jakobson, 5 May, box 12, folder 45, RJP. 편지에 연도는 적혀 있지 않으나, 편지에 담긴 내용은 이 편지가 1953년에 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의 텍스트는 프랑스어로 쓰였다. [본문으로]
- 같은 텍스트. [본문으로]
- 인류학과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에릭 회얼의 미디어 이론적 연구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레비-스트로스는 노트 카드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신화 구조를 계산하려는 의도를 가진 삼차원적 문서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이런 실험을 계속했다. 여기를 보라. Hörl, Die heiligen Kana¨le: U¨ ber die archaische Illusion der Kommunikation (Berlin, 2005), pp. 247–48n. 42 and 43. 회얼은 필자에게 레비-스트로스가 나중에 이 모델들을 파괴했으며 이것들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고 말해주었다. [본문으로]
- 필자의 참고문헌은 원래의 세미나에서 나온 요약되지 않은 텍스트이다. 여기를 보라. Jacques Lacan, The Ego in Freud’s Theory and i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1954–1955, trans. Sylvana Tomaselli (New York, 1988), especially pp. 171–205. [본문으로]
- 1950년대 초에 만들어지고 알려졌지만, 이 기계에 대한 첫 포괄적인 과학적 논술은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D. W. Hagelbarger, “SEER, a Sequence Extraction Robot,” I.R.E. Transactions on Electronic Computers 5 (Mar. 1956): 1–7. 이 기계에 대한 필자의 설명은 하겔바거와의 개인적 대화를 통해 보충되었다. 아네트 비슈 또한 이 기계와 라캉의 논평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 여기를 보라. Annette Bitsch, “Kybernetik des Unbewusstens,” in Cybernetics - Kybernetik 2, pp. 157–58. [본문으로]
- Lacan, The Ego in Freud’s Theory and i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1954–1955, p. 190.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Noam Chomsky, Structures syntaxiques (Paris, 1957)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Carol Wilder, “A Conversation with Colin Cherry,” Human Communication Research 3 (Summer 1977): 354–62, and Morris Halle, interview by author, Cambridge, Mass., Feb. 2008. [본문으로]
- 센터와 관련된 야콥슨의 최종 서신교환 중 하나는 1962년에 있었다. 여기를 보라. Townes, letter to Jakobson, 7 Dec. 1962, box 3, folder 64, RJP. [본문으로]
- 이 선을 따라 많은 과학 논문을 1960년대에 출간한 이후에, 조셉 와이젠바움은 『Computer Power and Human Reason: From Judgment to Calculation』(San Francisco, 1976)에서 그의 비판을 요약했다. 휴버트 L. 드레이퍼스는 1960년대와 70년대 동안 그의 비판을 발전시켰으며, 『What Computers Can’t Do: The Limits of Artificial Intelligence』(New York, 1979), 특히 165–66쪽에서 그의 논의를 요약했다.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Le´vi-Strauss, “Social Structure,” in Anthropology Today: An Encyclopedic Inventory, ed. A. L. Kroeber (Chicago, 1952), pp. 524–53.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An Appraisal of Anthropology Today, ed. Sol Tax et al. (Chicago, 1953), p. 111. [본문으로]
- 같은 저서, pp. 315–16. [본문으로]
- Henri Lefebvre, Au-Dela` du structuralisme (Paris, 1971), p. 72. [본문으로]
- Le´vi-Strauss, “Postscript to Chapter XV,” Structural Anthropology, pp. 342–43, n. 1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Shannon, “The Bandwagon,” IRE Transactions on Information Theory 2 (Mar. 1956):3.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F. L. H. M. Stumpers, “Review of Cybernetics, 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 by Norbert Wiener,” IRE Transactions on Information Theory 8 (July 1962): 332. [본문으로]
- CIA의 이런 활동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Kline, “Cybernetics in Crisis: Reviving and Reinventing a Postwar Interdiscipline in the United States.” [본문으로]
- Roland Barthes, Image, Music, Text, trans. Stephen Heath (New York, 1977), p. 31. [본문으로]
-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trans. Gayatri Spivak (Baltimore, 1976), p. 10. (한국어판: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역, 민음사, 2010년) [본문으로]
- Julia Kristeva, “Semiotics: A Critical Science and/or a Critique of Science,” The Kristeva Reader, trans. Hand, ed. Toril Moi, (New York, 1986), pp. 74–89.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Deleuze and Fe´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trans. Brian Massumi, volume 2 of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Massumi et al. (Minneapolis, 1987), pp. 75–85, and Foucault, “Message ou bruit ?” Dits et e´crits, 1954–1975, ed. Daniel Defert and Franc¸ois Ewald, 4 vols. (Paris, 1994), 1:557–60.(한국어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역, 새물결, 2001년)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Hayles, “Information or Noise? Economy of Explanation in Barthes’s S/Z and Shannon’s Information Theory,” in One Culture: Essays in Science and Literature, ed. George Levine (Madison, Wisc., 1987), pp. 119–42.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Galison, “The Ontology of the Enemy.” [본문으로]
- “프랑스 이론”이 상당부분 미국의 개입이라는 프랑수아 퀴세의 주장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라. French Theory: How Foucault, Derrida, Deleuze, & Co. Transformed the Intellectual Life of the United States, trans. Jeff Fort (Minneapolis, 2008). (한국어판: 프랑수아 퀴세, 『루이비통이 된 푸코?』, 문강형준, 박소영, 유충현 역, 난장, 2012년) [본문으로]
- 프랑스 이론, 특히 탈구축에 가하는 비판에 대한 고전적 텍스트를 보고 싶다면 여기를 보라. J. Hillis Miller, “The Critic as Host,” Deconstruction and Criticism (New York, 1979), pp.217–54. [본문으로]
- 여기를 보라. Alan D. Sokal and Jean Bricmont, Intellectual Impostures: Postmodern Philosophers'Abuse of Science (London, 1998). (한국어판: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적 사기』, 이희재 역, 한국경제신문, 2014년) [본문으로]
- Derrida, “Sokal and Bricmont Aren’t Serious,” Paper Machine, trans. Rachel Bowlby (Stanford, Calif., 2005), pp. 70–7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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