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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재현불가능한 것이 있는가? (알렉산더 갤러웨이)

아마도 독자 2023. 10. 11. 14:44
-이는 < Theory, Culture & Society> 28호(2011년)에서 발행한 Alexander Galloway의 「 Are Some Things Unrepresentable? 」을 번역한 것이다.

-오역에 대한 코멘트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주석은 PC를 통해 봐야 오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를 다루는 부분에서 랑시에르의 인용된 문장은 한국어판 번역본을 참고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2010년 봄, 뉴욕타임즈는 스탠리 맥크리스탈(Stanley McChrystal) 장군과 여타 군사 및 정부 관계자들의 회동으로부터 발췌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하나를 1면에 게재했다. 이 슬라이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군사 전략을 힘과 관계들에 대한 거대한 도표(diagram)의 형식으로 묘사한다. 놀라운 데이터 시각화인 이 슬라이드는 철저하게 상세하다. ‘부족 자치(Tribal Governance)’ 그리고 반군들(Insurgents)’과 같은 어구와 함께 제시된 120개의 노드들(nodes)은 아주 많은 선과 화살표들과 함께 연결된다. [역자 설명: 네트워크에서 노드는 네트워크 상의 하나의 ‘점’을 의미하고, 이 점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연결하는 선을 ‘엣지’라고 말한다. 앞으로 이 둘은 점이나 선으로 번역하지 않고 음역한다.] 순서도(flow chart)와 같이, 이 선들은 영향력의 연결고리(links)를 예시한다. 글꼴의 크기는 각 텍스트 제목의 상대적 중요성을 나타낸다. 색으로 칠해진 군집들(clusters)은 정부, 연합군, 인구, 반란군과 같은 주제들에 기반하여 광범위한 구역들을 표기한다. 하지만 단어와 연결들의 광포함은 눈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슬라이드가 전달하려고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혹은 실제로 어떤 것이든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림1.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군사 전략을 묘사하고 있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출처:  Bumiller (2010).

 “‘우리가 이 슬라이드를 이해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기게 될 것입니다.’ 맥크리스탈 장군이 담담하게 말하자 ... 회의실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Bumiller, 2010:1). 압도적인 양의 세부사항에도 불구하고, 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소화하기 힘들다. 사실, 높은 수준의 세부사항은 완전한 이해(comprehension)를 보조하기보다는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적 세부사항의 증가가 고조된 실재감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는 회화나 사진에서의 리얼리즘과는 다르게 (적어도 르네상스 이래로 어느 정도 지배적이었던 미학적 리얼리즘의 전통적 정의에서 말이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높은 수준의 기술적 세부사항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희석시키면서 인간의 감관(sensorium)을 압도한다. 오히려, 확대경을 통해 관찰되어도 복잡성이 감소되지 않는 프랙탈(fractal)처럼, 맥크리스탈의 파워포인트에 담긴 정보는 더 오래 들여다볼수록 더 일관적이게 되는 무엇이 아니다. 명료함을 피해가는 도표는 관찰자의 통제로부터 물러나며, 정보를 위한 매개체로서의 관찰자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킨다. 우리는 맥크리스탈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상태에 처한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군사 전략을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이러한 전략들이 애초에 얼마나 전달하기 어려운지를 전달하고 있는 걸까?

 잠시 별난 생각을 해보자. 만약 우리가 마치 회화에 대해 이야기하듯 맥크리스탈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대해 엄밀히 미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독특한 시각적 재현의 상표를 미학적 작업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군사적 삶의 회화? 하나의 네트워크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 아니면 더 나가서, 질 들뢰즈로(Gilles Deleuze)부터 빌려 온 용어를 사용하자면, 통제 사회(the society of control)(1995) 자체에 대한 하나의 시각화일까?[각주:1] 사실, 하나의 순수하게 미학적인 수준에서도 맥크리스탈의 파워포인트가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 파워포인트는 데이터, 하나의 알고리즘, 하나의 도표, 하나의 시스템, 하나의 네트워크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런 용어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기는 매우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 데이터는 알고리즘과는 매우 다르게 재현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 모든 용어들이 어느 정도는 정보의 산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정보 미학의 본질에 대한 흥미로운 점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투명성(transparency)과 은닉(concealment) 사이의 관계, 재현가능성(representability)과 재현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아마도 이미지의 명백한 감각적 특질, 이미지의 색깔 사용, 선과 단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텍스트 크기에서의 변주들은 곡선과 화살표들의 덤불에 규모의 감각을 주입한다. 네트워크 노드들의 경계를 표지하는 텍스트의 라벨들은 매력적인 질감을 달성한다. 어떤 노드들도 겹치지 않는다. 이미지의 고유한 부분을 점유하면서, 각각의 노드는 백색 공간의 해자로 둘러싸인다. 프레임 내부에 있는 이산적인 셀들에 골고루 퍼져 있는 각각의 노드들은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촉각적(tactile)’ 지각이라 불렀던 것(1985)을 보여준다. 선들 또한 잘 자리 잡고 있다. 단순한 펜의 줄긋기보단 링크에 가까운 이런 표지들은 움직임을 이미지에 도입한다. 하나의 복잡한 벡터 장(vector field)과 같이, 선들은 복수적인 관계와 위계들의 지도를 그린다. 흐름의 모든 부분에서 첫 번째,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면서 이 선들은 이미지의 부분들 사이의 특정한 연결들을 설립하는 동시에 다른 연결들을 떼어 낸다. 링크와 노드의 경향성을 완화하기 위한 것 마냥, 일곱 가지의 색상 군집감색, 연파랑색, 빨강색, 검정색, 연녹색, 암녹색, 오렌지색은 전체 이미지를 명확하게 표지된 구역으로 재조직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미군의 통제 하에 있는 바그다드 같은 도시와 다른 전 지구적 장소에 세워진 그린 존(Green Zones)’을 반향한다. 링크가 안팎으로 흘러 다닌다 해도, 색상 군집들은 제국의 권력에 대한 연합 하에 조직된 도시국가처럼 일관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미지에 대한 이런 독해는 여기까지가 한계이다. ‘데이터정보에 대한 모든 최근의 논의의 과정에서, 이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 혹은 실제로 애초에 이 용어들을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링크가 정보를 재현하는 반면에, 노드는 데이터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일까? 정보가 흐름들과 배열(arrangement)들을 통해 탄력적으로 구조화된 반면에, 데이터는 텍스트적이고 정적인 것일까?

 어원학은 다소 기본적인 지침을 제공해준다. 중성 분사인 라틴어 다타(data)는 말 그대로 주어진 것(the things having been given)’을 의미한다. 혹은 더 짧은 형태로, 이 용어를 더 우아하게 소여(the givens)’라고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어는 데이터를 도네(données)라고 부름으로써 이 이중의 의미를 보존하고 있다. 자연의 선물로서, 경험의 흔적으로서, 데이터는 단지 측정치들이나 기록된 사실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론적으로 날 것이며, 세상에 던져졌기보단 썰물 이후 남겨진, 벌거벗은,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데이터에는 측정 가능하거나 아니면 관찰 가능한, 앞에 주어져 있는 사실의 경험적인 건네줌(proffering)에 대한 강조가 있다. 무언가가 이미 일어났고, 하나의 선물 혹은 수여(endowment)를 통해 그것은 존재하게 된다. (이 마지막 요점과 관련하여,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항상 데이터가 특정한 현상학적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조적으로, 정보는 형식(form)을 취하는 행위 혹은 형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행위를 가리키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데이터와는 대조적으로, 정보는 현존과 앞에서-건네줌(giving-forth)의 감각을 강조하기보다는, 형태(shape)의 가소적인 채택을 더 강조한다. 정보(Information)는 세상의 사물들(things)형식화 되(in-formed)’거나 형식으로 표현되(put into form)’는 언제든 간에 존재한다.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가 예시적인 한 소품에서 한 번 언급했듯, 가을에 떨어지는 잎들은 정보를 가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잎들은 앞뒤로 흩날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잎을 형식에 가져다 놓는다면예를 들어, 잎들을 움직여 단어의 철자를 나타내거나, 혹은 단순히 잎들을 무더기로 긁어모음으로써 말이다잎들은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Druckrey, 1999). 이전에 주어져 왔던 세상의 사물들은 이제 형식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데이터가 경험적인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존재론적인 것의 영역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면(존재의 수준), 대조적으로 정보는 미학적인 것의 영역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또한 정보는 더 즉각적이고 극적인 방식으로 데이터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테제 중 첫 번째 테제를 가지고 시작해보자. <데이터에 필연적인 시각적 형식이란 없다. Data have no necessary visual form.>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참일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날 데이터 시각화의 늪에 빠져 있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가시화된 데이터의 바로 그 구현(embodiment)이 아니던가? 정보 시각화로 알려진 이미지-제작의 장르를 고려해보자. 수많은 예시들이 존재한다. 1940년대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의 영향력 있는 순서도부터, 칼 도이치(Karl Deutsch)통치의 신경들 Nerves of Government(1966)의 부록에 실린 대충 그려진도표, 프로이트(Freud) 작업의 네트워크 도표들(그리고 확실하게도 자크 라캉과 펠릭스 가타리의 작업에는 이런 것들이 가득하다), 에드워드 터프티(Edward Tufte)의 책들, 혹은 모든 것이 태양계 너머 어딘가로 자유롭게 부유하고 있는 거대한 콜리플라워를 닮은 듯 보이는 오늘날의 편재적인 인터넷의 지도(maps of the internet)’까지 말이다.

 확실히 첫 번째 테제는 매우 까다로운 것이므로, 좀 더 장황한 언어로 반복해야 할 것 같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수학적 값으로 환원된 데이터는 무엇보다도 숫자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숫자로서, 데이터의 주요 존재 양식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이지 않다라고 말함으로써 필자는 어떤 데이터 시각화든 간에 수학적인 것의 양식에서 시각적인 것의 양식으로의 우발적인 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학화(aestheticization)가 성취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이런 미학화의 행위가 동기가 없다거나, 무의미하다거나, 자의적이라거나, 아니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단지 어떤 데이터 시각화든 간에 추상적인 숫자를 기호학적인 부호(semiotic sign)로 변환시키는 번역 규칙들의 인위적 집합을 발명해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데이터 시각화는 무엇보다도 변환(conversion) 규칙 그 자체의 시각화이며, 오직 2차적으로만 원 데이터의 시각화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것은 아닐 테다. 데이터 시각화에서 인위적 요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명백하다. 하나의 데이터 시각화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위적 요소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 때문에, 모든 데이터 시각화는 무엇보다도 우발적 관계들의 대양 위에 중첩되는 필연성(necessity)의 논리를 위한 하나의 극장일 것이다.

 첫 번째 테제의 술부에 형식이라는 단어가 이미 존재하고, 만약 독자가 엉성한 삼단논법을 허락한다면, 데이터와 정보 양자가 대수적(algebraic) 관계와 같은 것으로 통합될 수 있도록 첫 번째 테제를 재조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데이터에 필연적인 정보란 없다. Data have no necessary information.>

 [데이터에 필연적인 정보는 없다고, 데이터는 형식이 부재하며 형식화(formation) 이전에 존재한다고, 데이터는 세계의 순전한 성분이자 측정의 원재료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렇게 말하는 것은 데이터를 다음과 같은 유사한 존재론적 기반에 가져다 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인material cause, 스피노자의 실체substance,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s, 바디우의 순수 다수pure multiplicities, 혹은 들뢰즈의 일자의 표면 위의 강도들intensities on the surface of the One. 이런 것들이 데이터에 대한 현재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철학 내부의 원천들이다. 비슷하게, 정보를 위한 더 나은 철학적 맥락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고대 철학의 유령, 순수하게 물질적인 영역이 아닌 영원한 형상의 영역인 영혼과 진리와 아름다움의 영역을 환기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들뢰즈에게서 정보는 부글거리며 혼돈스러운 물질적 평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들뢰즈가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라 부른 것, (평면을 횡단하는 잠재성potency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이 첫 번째 테제가 현상학을 모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테제가 소여성 내부의 필연성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 번째 테제는 단지 형식이 데이터 내부에 논리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형식 없이도 데이터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진술한다. 물론 형식 개념에 거의 동어 반복으로 묶여 있는 정보에 대하여 동일한 것을 말할 수는 없다.]

 이제 두 테제 중 두 번째로 넘어가 보자. 시작부터 끝까지, 수 십 년에 걸쳐, 동일한 것의 방대한 반복 그 이상이 아닌 하나의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오직 하나의 시각화만이 정보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Only one visualization has ever been made of an information network>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림2. 다른 방법론과 소스들로 생산된 네 개의 다른 인터넷 지도들. 평범한 웹 검색을 통해 이용가능한 많은 사례들에서 선정했다.

 

 독자들은 다행히도 앞서 맥크리스탈의 지도에 행해졌던 같은 종류의 정밀조사를 피하게 되겠지만, 오늘날 인터넷 지도를 광고하는 데 이용 가능한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 (그림2), 혹은 인간 신경망 지도’, 혹은 더 나아가 우리가 봤던 것과 같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전략 지도에 뚜렷한 획일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거점 노선 운항 방식(hub-and-spoke)의 클라우드 미학이 지배적이다. 미세한 가지 구조가 함께 군집해 복잡한 3차원 공간을 형성한다. 노드들은 링크들에 의해 연결된다. 작은 모세혈관들이 더 큰 동맥에 합병되어 흐름과 흐름에 대한 금지를 통치하는 거대한 계층 구조를 직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도, 지도의 가독성(legibility)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향적이고, 심지어 이데올로기적으로 동기 부여되어 있는 것으로 남는다. 관찰자는 디지털 궁창(firmament)에 대한 모호한 특정 우주론적 사실들을 직관할 수 있는 반면에 (명백히 정보는 군집하기를 좋아한다; 저마다의 색을 가진 이런 집단 거주지는 섞이지 않은 채로 영속한다; 우리는 결국 나무를 사랑한다), ‘토대 위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누가 연결하고 누가 연결하지 않는지; 프로토콜논리적인 소프트웨어와 독점적인 소프트웨어 사이의 네트워크-내부의 투쟁들; 피라미드 계층구조의 물화; 무지불 미세노동의 화폐화). 그러므로 필자가 여기서 제안하고 있는 것은, 쉬운 말로 하면, 모든 인터넷 지도가 동일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모든 소셜 그래프의 시각화는 동일하게 보인다. 워드 클라우드(word cloud, 단어 시각화)는 순서도와 같고 순서도는 인터넷 지도와 같다. 모든 것이 미학적 코드들의 하나의 단일하고 균일한 집합 내부에서 작동한다. 이런 미학적 공간의 크기는 1(하나)이다.

 미학의 관점에서 이것의 영향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이 균일한 미학적 공간에서는 어떤 시학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결국에 모두 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형식적 분석의 수준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장르 구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이 공간에서 고급문화 대 저급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민속 언어 혹은 모더니즘적 원동력과 그 밖의 이런 경향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이것이 컴퓨터 문화가 아이콘들의 용어로 말하는 이유이며, 오늘날의 정보 미학을 단색의 다양한 부호들이 다른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일종의 신()-상징주의(neo-symbolism)로 묘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일한 기호적(symbolic) 코드가 군림하고, 보편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one)에 대한 재현은 사실 무(nothing)에 대한 재현이다.

 이 두 테제를 소개하는 데 있어서, 바람은 디지털 미학 내부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적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 테제를 나란히 재진술해서 서로를 비교하고 충돌시킬 수 있도록 해보자. 테제1: 데이터에 필연적인 시각적 형식은 없다. 테제2: 오직 하나의 시각화만이 정보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이 두 테제 사이에는 변증법적 긴장이 존재한다.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면, 모든 네트워크 시각화가 동일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딘가에는 우리에게 단 하나의 미학적 양식을 가지도록 강요하는 일종의 명령(mandate)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명령의 기원은 무엇인가?

 한편으로 테제1은 디지털 미학을 무(, nothing)로서 주장한다. 다른 한편, 테제2는 디지털 미학을 하나(one)로 주장한다. 데이터는 그것이 어떻게 미학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전혀 도움을 주지 않거나, 단일한 보기의 방식 하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가능성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 흥미로운 모순에 이름을 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정보 미학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재현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의 딜레마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 테제 12 사이에는 인지적 부조화가 있다. 여기서 필자의 목표는 이런 부조화를 제거해버리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부조화를 해소하려고 시간을 낭비해서도 안 된다. 필자의 목표의 기능은 두 가지 테제를 경유하고 횡단하며 존재하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등장하는 무언가, 즉 재현불가능성의 논리를 조명하는 것이다. 테제1이 재현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반면, 테제2는 재현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이런 이유로 중간(the middle)은 상실된다. 사슬의 양 끝만이 남게 된다. 한쪽 극단에서, 정보 미학은 실패하는데, 그것이 지배적인 형식의 그림자로부터 달아나 대안적인 형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극단에서, 정보 미학은 실패하는데, 그것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해서 하나의 형식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매개(mediation)는 실종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여기에는 어떤 매체(media)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주장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작업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재앙’(2003)으로서의 시뮬라크럼(simulacrum) 개념과 그의 매체를 위한 진혼곡’(2006) 모두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지점은 가장 큰 비-커뮤니케이션(non-communication)의 지점으로 나타난다. 재현과 행위를 위한 모든 선택지들이 어떻게 예측됨, 회피됨, 선제됨, 그것도 아니면 추측됨이라는 미덕에 의해 테이블에서 사라졌는지를 고려해보면, 보드리야르가 가장 개탄한 것은 공적인 것의 와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기능적인 (알고리즘적) 효율성의 증강은 상징적 효율성의 쇠퇴와 나란히 간다. 여기에 맥크리스탈의 법칙이라 별명을 붙일 수도 있겠다. 미학적 정보의 증가는 정보 미학의 쇠퇴를 생산한다. 따라서 아마도 네트워크 시각화 자체는그것이 자신의 고도로 정확하고 기교적인 수준의 세부사항을 과시한다 해도가시적인 것의 뒤에/너머에 다른 이야기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재현 불가능한 어떤 것들이 있다. 그리고 컴퓨터는 이 영역으로 안내하는 우리의 가이드다.

 이런 입장은 일종의 소수의견 비슷한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저자들의 글은 이를 조금 다르게 프레이밍했다. ‘재현 불가능한 것이 있는가?’(2007)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쓴 에세이의 제목이다. 그와 오늘날의 다른 많은 사상가들은 이미지의 권력, 그리고 이미지의 미래를 둘러싼 느슨한 논쟁에 관여해 왔다. 그들은 이미지에서 폭력을 묘사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는 고문에 대한 그래픽 이미지들이 대중 매체에서 순환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묻는다. 그들은 묻는다. 이미지가 죽일 수 있는가(Mondzain, 2010)?

 이 에세이와 다른 글에서 미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작업은, 재현을 예술 내부의 특정한 체제(regime)’라고 하는 관념에 의존한다. 그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재현적 상황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그가 재현의 내재적 불가능성(internal impossibility)’이라고 부른 것에 의해 촉발되는데, 이는 꾸밈없고 기교 없는 솔직한 이야기(straightforward tale)’를 옹호한다(Rancie're, 2007: 111, 110). 그는 이런 양식을 플라톤 그리고 예술을 위한 플라톤의 윤리적 틀과 연관 짓는다. 두 번째는, 재현에 대한 모욕(indignity)’으로부터 유발되는데, 이는 숭고(sublime) 예술에 대한 요구를 계속하며,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유할 수 없는 것의 흔적을 기록하려고 한다(Rancie're, 2007: 111). 랑시에르는 이런 양식을 칸트적, 더 나아가 버크적인 숭고라는 더 근대적인 관념과 연관 짓는다. 따라서 재현불가능성여기가 그의 트릭이다그 자체로 재현의 실패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한 체제에서 그 다음 체제로의 역사적 변동에 대한 질문이다.

 랑시에르에게서 푸코(Foucault)의 영향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가 논의하길, ()-재현(anti-representation)미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새로운 체제를 개시하는 미학 혁명의 도래와 함께 발생한다. 미학적 체제의 특징은 주제들과 예술 간의 와해이다. ‘특별한 주제와 특별한 형식 간의 타당성에 대한 규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주제들은 어떤 예술적 형식을 위해서라도 일반적으로 이용 가능해진다’(Rancie're, 2007: 118). 따라서, 미학적 체제는 특히 근대 시기 동안 일어났던 문화의 신성모독 혹은 세속화, 때로는 단순하게 근대성의 허무주의라 불렸던 것과 많은 것을 공유한다. 하지만 또한 이 체제는 모든 가치를 하나의 횡단문화적인 수프에 야심차게 평탄화(leveling)하는 것을 그 자체로 표명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소위 말하는 주인 서사의 종말과 양립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 다음, 랑시에르는 이런 점에서 재현의 반대항이 비()-구상(non-figuration)이 아니라는 점을, 즉 재현의 반대항이 모더니즘이 아니라는 점을 꽤 정확히 지적한다. 대신에 그는 가장 비-재현적인 형식을 위해 리얼리즘에 주목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데, 왜냐하면 리얼리즘에서 모든 것은 평탄화되고 동등하게 재현가능하며, ‘동등하게 재현 가능한 것은 재현적 시스템의 파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Rancie're, 2007:121).

 이런 사고 흐름의 극적인 결과는 쇼아(Shoah) 그리고 예술에서 홀로코스트가 재현될 수 있는 ()가능성과 연관된다. 랑시에르는 두 가지 문학적 발췌들, 부헨발트(Buchenwald) 수용소에서의 매일의 삶을 다룬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인류 Human Race와 문학적 리얼리즘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플로베르(Flaubert)마담 보바리Madame Bovary를 나란히 놓는다. 그 언어는 현저하게 유사한데, 결합되지 않는 구절의 목록들과 평탄한 관찰들의 병렬적 문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베르 앙텔므가 겪었던 강제 수용소의 경험, 그리고 [보바리에서] 샤를과 엠마의 발명된 감각적 경험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덧붙여진 작은 지각이라는 동일한 논리에 따라, 그들의 침묵을 통해서, 최소한의 청각적·시각적 경험에 대한 그들의 호소를 통하는 동일한 방식에 따라 전달된다(Rancie're, 2007: 125, 강조는 필자).

 

 그러므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 가진 문제는 정확히는 재현 자체에 대한 문제, 즉 무언가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표현불가능성(ineffability)은 문제가 아니다. 랑시에르가 논의하길, ‘사실 오히려 문제는 정반대다. 이런 경험을 전달하는 언어가 결코 그 경험에 특정적(specific)이지 않다는 것이다’(2007: 126, 필자 강조). 다시 말해서, 그 언어는(역자설명: 로베르 앙텔므와 플로베르가 구사한 언어를 말한다) 불가능한 언어도 아니고, 특정적인 언어도 아니다. (어쩌면 더 도발적으로, 그 언어가 가능하며 포괄적이라고 제안한다.) 너무 이례적이고 특별해서 강제 수용소에서의 삶을 번역하는 데에만 사용될 수 있는 특별한 문학적 문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우리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작업에서 빚지고 있는 악의 진부함이라는 관념에 대한 다른 이해 방식이다. 랑시에르에게, 이런 진부함은 두 가지 거대한 매개 양식, 즉 한편에는 재현의 특정성, 다른 한편에는 미학적인 것의 포괄성(genericness) 사이의 균열을 보여준다.

 재현과 미학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랑시에르는 옳다. 그리고 일종의 트릭이더라도, 재현불가능성이란 미학적인 것으로의 변동을 의미한다고 말할 때 그는 본질적으로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형의 담론, 즉 재현불가능성을 정치적 폭력에 대한 질문(여기서 홀로코스트는 이 질문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험이다)에 굳게 뿌리 내리게 하는 유형의 담론에 관하여 환기되기를 기다리는 약간 다른 견해도 있다.

 완전한 참고문헌 세트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랑시에르의 에세이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저자들의 작업과 많은 것들을 공유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책 사진에 관하여 On Photography타인의 고통에 관하여 Regarding the Pain of Others를 살펴볼 수도 있고, 또 손택에 응답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최근 에세이인 고문 그리고 사진의 윤리: 손택과 함께 사유하기 Torture and the Ethics of Photography: Thinking with Sontag를 살펴볼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손택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약속의 땅 Promised Lands>도 고려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진행 중인 아랍-이스라엘 갈등, 그리고 특정하게는 폭력의 문제와 어떻게 폭력이 사진적 형식이나 영화적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없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비슷하게는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놀랄 만한 영화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 Images of the World and the Inscription of War>이 있으며, 더 나아가 2003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수용소에서의 사진 문제를 다룬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책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아우슈비츠에서 온 네 장의 사진 Images in Spite of All: Four Photographs from Auschwitz도 있다.

 ‘재현불가능성은 특정 종류의 폭력을 통해서만 답해질 수 있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오늘날 더 구체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담론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결론에 동의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매우 다른 조건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사실은, 비슷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랑시에르가 예상하지 못했거나 아마도 랑시에르가 지지하지 않을 많은 우회로를 거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랑시에르 그리고 그에게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동조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입장의 주요한 어려움은 사실 이 문제가 재현가능성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정서적(affective) 반응에 대한 문제이다. 고통을 다룬 사진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까? 만약 우리의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건가? 그러므로 랑시에르의 관심사는 단순히 재현과 재현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결코 아니라 윤리적 의무에 대한 관심이다. (우선은 재현과 윤리적 의무가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플라톤주의 같은 특정 전통은 예외로 두자그리고 랑시에르는 확실히 플라톤주의자가 아니다.)[각주:2] 가끔씩 그는 신경질적인 자유주의자 역할을 맡아서, 특정한 이미지가 야생으로 탈출할지, 그리고 만약 탈출한다면 그 이미지를 목격하는 관객들이 적절한 감정적 반응을 보일지 걱정한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적절한 주체 위치의 창조 및 유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입장은 꽤나 익숙한 시각문화 담론이다. 바로, 이미지의 권력은 이미지의 은폐된 순환 혹은 이미지의 가시적인 순환에만 의존한다는 것. 이미지는 인구 내부의 감정적 반응의 도화선으로서 존재할 수도, 그 동일한 인구의 이미지에 대한 무감각함의 냉소적 증거로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 영향을 미치거나 무력하거나이런 것이 오늘날 재현의 함정이다.

 랑시에르는 최근의 책 해방된 관객 The Emancipated Spectator에서 이를 약간 바로잡고자 한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해결책전형적인 포스트-구조주의적 방식으로, 그는 우리가 보기와 행위하기 간의 대립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고려하고, 이 이항대립을 흐리고,’ 원인과 결과를 떼어놓아야(dissociate)’ 한다고 제안한다이 오늘날 재현가능성의 핵심 문제를 다루는 데 충분할 것인지는 완전히 확실하진 않다(Rancie're, 2009: 13, 19, 14).

 랑시에르의 문제재현불가능성이 사람들에게 폭력을 논하도록 윤리적으로 의무를 지게 한다는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해결책을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데이터 시각화와 관련된 서두의 논평에 다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치적 폭력과 비교했을 때, 데이터 시각화는 사실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지금 실제 생명의 악의적인 파괴, 수용소의 어두운 비인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요점은 정치적 폭력에 대한 정보적 폭력(informatic violence)’의 우세함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논쟁을 제기하는 것조차도 많은 것을 혼란스럽게 하며 설명해주는 것도 거의 없다.

 오히려 요점은, 랑시에르에게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사진에서의 정치적 폭력의 문제를 언급해 온 버틀러 같은 사람들의 작업에서도 역시 드러나지 않았던 예술의 체제를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 (이 예술의 체제가 어디서든 등장한다면, 이는 들뢰즈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가 사회적이고 미학적인 틀인 통제 체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이는 아부 그라이브나 쌍둥이 타워처럼 유별나게 스펙타클하거나 홀로코스트의 근대 기계와 같이 재앙 같이 무자비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자체의 특정한 배치(deployment)에서 서서히 스며들고 만연해 있는 자신만의 폭력의 유형을 가진다. 따라서, 만약 들뢰즈가 통제 사회라고 부른 것 내부에서 우리가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면, 랑시에르의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해결책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사회에 내재된 폭력을 성찰하도록, 그런 종류의 폭력이 재현되거나 재현되지 않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하도록 의무를 지운다.

 통제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것들이 이야기될 수 있지만그리고 얘기되어 왔지만, 이 글에서는 그저 통제 체제와 관련된 하나의 주장만 제시하고자 한다. 분명 약간은 불만족스럽겠지만, 이를 일종의 서술적인 도발로 받아들이자. 통제 사회의 주요한 결과 중 하나는, <우리가 단일의 기계들(singular machines)이 이미지의 증식을 생산하는 조건으로부터 기계들의 다양체(multitudes)가 단일한 이미지들(singular images)을 생산하는 조건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이다.> 이 테제의 첫 번째 절반을 설명하기 위해 시네마적 카메라 혹은 사진적 카메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단일 장치는 지속적인 변형에서 수많은 이미지들을 산출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랑시에르의 관심사는 사진과 영화라는 패러다임의 사례에 의해 구속되는 고유한 영역 내에서 유효하다.[각주:3]

 두 번째 절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위키피디아(Wikipedia)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여기서 단일한 (데이터) 이미지는 랩톱 컴퓨터에서 수많은 엔드 유저들(end users)에 의해 생산된다. (역자 설명-엔드 유저 혹은 최종 이용자는 구축된 시스템을 실제로 소비·사용하는 이용자를 말한다. 이 경우엔 위키피디아에서 여러 문서들을 편집하는 이용자들을 말한다.) 혹은 위에서 살펴 본 네트워크 시각화를 생각해보자. 이 단일한 미학적 형식은 조직적이지 않은 수많은 네트워크 과학자와 웹 디자이너들에 의해 생산된다.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에 대한 그 저항력에 있어, 이는 오늘날 기계의 다양체의 손에 놓인 이미지의 단일성(singularity)을 예증한다. 아주 말 그대로, 네트워크를 다른 이미지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하는 데 대한 무능력이 존재한다. 단일한 이미지가 있으므로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폭력과 재현불가능성을 다룬 기존의 담론에 대한 자극 속에서, 국가의 후원을 받는 고문이나 여타 정치적 폭력의 이미지에 대한 가정된 재현불가능성에 대해 초조해하는 사람들은 장치에 대한 맹목의 흥미로운 형태를 드러낸다. 이들은 생산 양식(the mode of production)에 대한 맹목의 형태를 드러내면서, 고귀할 수도 있는 정치적인 근심을 예술에 대한 관찰로 승화시킨다. 물론 폭력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미지와 폭력 사이에 어떤 기계적인 연결고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사진이 유출됐다, 혹은 그러지 않았다(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슬퍼했고 적절한 경로로 항의했다, 혹은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이 명백히 거짓이 아니라면 이는 고귀한 추구가 될 것이다. 누군가 결과에 대해서 불안을 느낀다 할지라도, 재현은 발생했다. 문제는 통제 사회에 대한 충분한 시각화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현은 발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건가? 우리는 첫 번째 원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재현을 위한 구성적(constitutive) 축은 생산양식의 부수현상인 이데올로기적 교만과 국가 권력의 속임수와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생산양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재현불가능성이라는 게 작용 중이라면, 그것은 생산양식과 사회-역사적인 상황의 현실을 둘러싸고 작용중일 것이다. 재현불가능성은 경제적 토대를 보여주고 은폐하는 논리를 통치할 것이다. 아니면, 더 프로이트적인 언어를 선호한다면, 꿈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재현될 것이 (실용적으로 말해서) 어떻게 가장 비가시적인 것이 될 바로 그것인지를 생각해보자. 우리의 일상에 가장 많이 침투한 것이 어떻게 우리의 손과 마음에 놓인 유형적 가변성으로부터 물러나는 것과 동일한 것일지에 대한 논리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이런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정보 경제에 대해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야말로 오늘날 생산양식의 현현(incarnation)인 것, 즉 권력의 분산 네트워크로의 확산, 지방 자치적 의사 결정의 증가, 산업에 의한 사회 질서의 지속적인 파괴, 일상 내의 미세한 몸짓에 대한 세분화와 합리화, 무지불 미세노동을 둘러싼 혁신들, 정서의 화폐화와 소셜 그래프’, 프로토콜논리적인 조직 내에서의 보편적인 행동의 포획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재현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또한 새로운, 만연하고 스며들어 있는 사회적 폭력의 전조가 아니던가?

 거룩하고 숨죽인 목소리로, 군사 포르노의 날조된 CNN 스펙타클에 대해 재현의 진실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요점을 전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이를 모두 던져버리자. 재현불가능성의 지점은 권력의 지점이다. 그리고 오늘날 권력의 지점은 이미지에 있지 않다. 오늘날 권력의 지점은 네트워크에, 컴퓨터에, 알고리즘에, 정보에, 그리고 데이터에 거주한다. (누군가는 마지막 요점을 부정할 수 있겠지만, 이를 부정하고 유물론자로 남을 수는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아있다. 오늘날 권력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맥크리스탈의 도표에 필적하면서도, 그 도표를 반박하고 거부하는 대항 경향들이 이미 존재한다. 네트워크 시각화가 자체 데이터를 난독화하는 경향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적절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네트워크 시각화는 또한 조직과 권력의 체계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예술가 마크 롬바르디(Mark Lombardi)가 그린 대형 지도일 텐데, 이 지도는 강박적인 세부사항을 가지고 권력 체계의 복잡한 상호연결성(interconnectedness)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파리 기반의 그룹인 뷔로 데튜드(Bureau d’etudes)가 생산한 굉장히 아름다운 정보 지도들, 자아 복합체(Complex of the Self),’ ‘네트워크에 의한 통치(Governing by Networks),’ 그리고 정보를 통한 농·식품 산업의 관리(Governing the Agro-food Industry through Information)’와 같은 제목이 붙은 큰 도표들, 그리고 영향력의 행사와 밀실권력의 장악의 흐름을 조명하는 도표들을 생각해보자(뷔로 데튜드를 보라, 연도미상). 흥미롭게도, 이런 작업들은 형식보다는 내용의 수준에 개입하여 오래된 클리셰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뷔로 데튜드의 작업은 복잡하고 알록달록한데, 이들이 만든 많은 지도들은 아까 논의되었던 순서도 스타일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 포함된 데이터에만 의존해야 한다. 연구에 기반을 두면서 계시적인 이들의 작업은 산업, 정부, 그리고 엘리트가 깊게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권력 장치를 벌거벗긴다.

 이런 접근 방식의 징조는 (강사이자 교육자로서의 글과 작업을 통해) 브라이언 홈즈(Brian Holmes)의 작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네트워크화된 저항 및 심리지리학을 포함하는 다른 주제들과 뷔로 데튜드에 대해서 글을 쓴 바 있는 홈즈는(Holmes, 2008), 정보의 대항-지도학 같은 것을 제안한다. 이 정보의 대항-지도학에서, 정보적 상상력의 주어진 프로토콜은 엄격하게 테스트된다. 이런 개입들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런 개입들이 재현불가능성의 딜레마에서 탈출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이것들은 네트워크 시각화의 하나임(one-ness)’에 대한 필자의 두 번째 테제를 분명히 해주는 경향이 있다), 이런 개입들이 네트워크 시각화의 난독화하는 힘에 구속되기 보다는 그것의 잠재적인 교육학적 가능성, 잠재적인 동원 가능성에 구속된 일련의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두 테제가 보여주듯, 지도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내용은 궁극적으로 지도 형식의 행위유도성(affordances)과 금지에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대항-지도학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끝으로, 데이터의 수준에서 사회적 지도를 비판하려는 다양한 시도에 머물지 말고, 대신 정보의 수준에서 그것을 비판하려는 몇 가지 시도를 생각해보자.

 2004MIT 캠퍼스에서 스타타 센터(Stata Center)가 개관했는데, 이 따끈따끈한 새 대학 건물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했다. 형태는 다른 형태 위에 폭포처럼 쌓여 우연한 움직임의 틈새를 통해 시간 내에 동결된 탈형태화(deformation)의 프레스코화를 생산해낸다. 프랭크 게리의 말로 하면, 이 건물은 취한 로봇들이 모여 축하 파티를 하는 모습을 닮았다’(Pogrebin and Zezima, 2007).

 그러나 개관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설계상의 실패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건축의 역사에는 누수되고, 균열이 생기고, 그것도 아니면 좋은 건축의 기본적인 필수요소에 부응하는 데 실패한 대표 건물의 기나긴 전통이 있다. 스타타 센터는 명백히 같은 운명을 겪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건물이 여러 방식으로 나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학은 설계 및 시공의 결함을 이유로 2007년에 게리를 고소했다. 아이러니는 명백하다. 게리는 매우 구체적인 형태의 미학화된 파손(breakage)으로 명성을 쌓았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건물의 부서짐(breaking)에 대해 비난받았다. 그는 부서진(broken) 형태를 만들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여기서 그의 형태는 부서지고 있었다. 그의 미학적 실패는 건축적 모더니즘의 국제 양식인 미니멀리즘과 기능주의에 대한 반작용에서 유발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제기된 혐의인 설계 실패라는 관념은 역설적인 것이다. MIT 행정부가 증언하듯, 건축적 설계가 기호적이거나 상징적인 수준에서 균열이 생기고 휘어지는 것은 허용된다 하더라도, 물질적 기능성의 수준에서 실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벽은 구부러지거나 휘어질 수 있지만, 균열이 발생할 수는 없다. 요컨대, 기능에서의 실패가 적절히 기능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능에서의 실패가 여하간 나타난다면, 이것들은 미학적 표현으로 변환되어야만 하고, 이것들의 파손은 미리 제거되고 완전히 다른 결과물로 재배치되어야 한다. (이와 대립하는 현상이 다른 악명 높은 누수 건물에 존재하는데, 이 건물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형태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모더니즘적 스타일 내부에 있던 누수는 기능상의 진정한 실패이다. 게리의 기능상의 실패가 의뭉스러운 반면에, 이 실패는 기능상의 순수한 honest’ 실패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정보적 실패기능의 실패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운 것이거나 예술적이라면, 보통은 순수하게 미학적인 방패 아래에서 재구성된다. 이와 같이, 장 팅겔리(Jean Tinguely)의 키네틱 조각부터 토니 콘래드(Tony Conrad)의 플리커 영화(flicker films), 혹은 솔 르윗(Sol LeWitt)의 프로그램적 드로잉, 혹은 Jodi.org의 컴퓨터 아트까지 기능의 변질을 경유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논의의 이 지점에서 게리와 다른 예술가들을 언급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시작할 때 언급했던 것과는 다른 접근법, 정보 시각화에 대한 하나의 접근법에 대한 증거를 여기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를 해체주의자라 이름 붙이기를 고집하든 아니든, 게리에게 추진력은 정보 시대의 근본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본질에서 나온다. 이 본질에서, 어떤 형식적 데이터든 간에 내부로부터의 자체적인 변질에서 면역 상태이지 않으며, 이 데이터는 이전에는 말끔했던 내부 가설물(scaffolding)을 알고리즘적 반복에서 태어난 뒤틀린 표면 호(arcs)와 유기적인 블롭(blobs)’으로 변형시킨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게리는 블록과 구겨진 종이를 사용하여 설계를 한다는데, 이는 주의 전환의 오류다. 설리번Sullivan의 마천루가 제철소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처럼, 게리의 건물들은 컴퓨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혹은 팅겔리나 콘래드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기계 자체이며, 이는 사물의 순수한 기계적 배열이 차단되어 있든 아니면 리다이렉트되든 간에 본질적인 경험을 통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니면 르윗과 조디는, 서로 분기하는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방식을 씀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코드를 비-코드(non-code)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배치한다.

그림3.  Jodi.org, ‘OSS bcad’. 출처:  Baumga¨rtel (2002: 46, detail).

 

 하지만, 기능적 정보학이 감각을 위한 일종의 즐거움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사례들에 대해 매우 냉소적으로 생각해보고(이 사례들이 멋진 예술 작품들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지는 않다), 이런 작업들이 기능적 정보학 그 자체를 탐구하지는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해보자. 일반적으로, 게리와 여타 예술가들은 기계를 파손된 아름다움으로 재상연하면서 단지 그것을 파손하는 가장을 한다. 알고리즘적인 것과 씨름하는 와중에, 각각은 궁극적으로 미학적인 것을 위해 알고리즘적인 것을 희생한다.

 이 예술가들 중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새로운 데이터 유형, 새로운 if-then 진술문, 새로운 네트워크 도표, 새로운 삼단 논법, 혹은 새로운 수학 함수를 창조하고 있지 않다. 많은 개념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예술가들은 체계성이나 기능주의를 실험할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기계적 현실을 순수 예술의 안정된 구조로 되돌린다.[각주:4] 이들은 기계를 예술로 전환하지만, 결코 예술을 기계로 전환하진 않는다. 그리고 드물게 후자가 결실을 맺게 될 때, 그것은 한 세대 전의 앤디 워홀(AndyWarhol)이나 오늘날의 제프 쿤스(Jeff Koons)처럼 예술 공장(the art factory)’이라는 기치 아래서만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맥크리스탈의 법칙에서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게리, 조디, 그리고 여타 예술가들은 오직 역으로만 맥크리스탈의 법칙을 실행한다. 미학적인 것의 승리가 정보적 명쾌함의 감소를 촉발시킨다. 정보 미학의 증대는 미학적 정보의 감소를 생산한다. 법칙이 순서대로 읽히든 역순으로 읽히든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재현불가능성의 함정에 갇혀 있다.

 스타타 센터는 이 시대의 기호다. 스타타 센터는 여기서 탐구된 기본 난제를 드러낼 수 있게 도와주며, 우리는 이를 문화적 생산과 해석의 세 가지 기본 국면에 따라 요약할 수 있다. 데이터에 형식을 부여하려고 할 때, (1) 네트워크 과학자와 웹 디자이너들은 순수한 체계성을 미학화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알고리즘적인 것을 위해 미학적인 것을 희생한다. 많은 인터넷 지도가 증명해주듯 말이다. 그러나, (2) 게리나 조디 같은 다른 사람들은 기계를 파손시키는 마냥 가장하고 그것을 파손된 아름다움으로 재구성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미학적인 것을 위해 알고리즘적인 것을 희생한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크게 개선된 것이지만, 두 선택지 모두 궁극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들은 (3) 통제사회 내에서 재현가능성의 바로 그 항들을 재매핑할 필요가 있다. 양쪽 항들이 그것의 적절한 집으로, 애초에 그것을 생산했던 사회-정치적인 현실로 돌아가도록 말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재현을 위한 구성적 축은 언제나 생산양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문제는 이 축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안 그랬던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통제사회를 재현할 수 있는 비판적 혹은 시적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방법론에 대한 간략한 검토로 마무리해보자. 왜냐하면 세 번째 국면, 사회적인 것을 재매핑하는 국면에 상응하는 비판적 방법론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이런 시도에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회적 총체성(totality)에 대한 잠정적 지향을 성취하기 위한 시도로 정의되는 인지적 지도그리기는 많은 제임슨의 텍스트에서, 특히 영화에 대한 두 권의 저서에서 묘사된다(1992a, 1992b). 인지적 지도그리기는 전체루카치의 용어대로라면, 총체성로서의 사회적 삶의 진실이 이용 가능한 미학적 표현이나 절합의 가능성과 점점 불화하는’(Jameson, 1992b:54) 역사적 모순으로부터 등장한다. 제임슨이 설명하길, 인지적 지도는 전체로서의 사회 구조의 앙상블(ensemble)이라 할 수 있는 총체성, 즉 광범위하고 적절하게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총체성에 대해, 개인 주체가 상황에 따른 재현을 수행할 수 있도록요청된다. 이 방법론이 유용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정치적 폭력(아부 그라이브, 관타나모 베이, 쌍둥이 타워)에 대한 모든 매개가 그런 경향이 있는 것처럼 국가가 논쟁의 용어들을 받아쓰기하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제임슨의 방법론은 책임을 역사의 발자취에 확고히 두고 있으며, 물론 정치적 폭력의 우여곡절을 포함할지는 모르나 그것에 의해 결코 결정되지는 않는 사회-역사적 상황이 주체를 에워쌀 수 있도록 해준다. 현재의 그/녀의 재현을 부풀리고 굴절시키면서 말이다.

 이런 이유로, 정보의 지도를 그리려는많은 시도들은 기대에 못 미친다. 왜냐하면 이 시도들은 우리에게 사회적 총체성 내부에서의 방향이랄 것을 하나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 심하게, 이것들은 사탕 색깔의 선과 노드들 뒤에 방향을 가림으로써 문제를 악화시킨다. 정보 사회의 인지적 지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테크닉들은 오늘날에도 거의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는데, 비유적인 것으로서의 통제의 알레고리같은 것들에 대한 필요성은 오늘날의 통제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임슨이라면 결코 맥크리스탈의 이미지가 시스템의 지도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라면 그 이미지가 시스템의 지도를 위한 하나의 알레고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 차이는 미미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요점은 인지적 지도그리기로의 복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매우 중요하긴 하다), 이 새로운 불가사의한 기계적 공간을 위한 그 자체의 하나의 시학을 요청하는 것이다.

 (여기에 현상학의 영향이 남아있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철학적 실재론자들의 꿈은 대개는 망상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 과학 사이에는 강력한 해석학적 통로가 필요하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는 활성화된 상관주의correlationism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실증주의적 과학에 의해, 산업에 의해, 경제적 토대에 의해 하나는 상실된다.)

 푸코가 언급했다가 나중에 철회한 유명한 말처럼, 로고스(logos)는 반대항을 갖지 않는다. 그가 광인과의 관계에 있어 그것을 말했을 때 그는 틀렸지만, 이 말은 아마도 오늘날 기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진실을 담지하고 있다. 오늘날의 시스템학(systemics)은 반대항을 갖지 않는다. 알고리즘과 여타 논리 구조들은 독특하게, 그리고 아마도 놀랍지 않게도 그들의 역사적 발전 내에서 단일적이다. 도시에는 하나의 게임이 존재한다. 환원적이고 체계적인 효율성과 편법의 실증주의적 지배라는 게임이. 이런 체계성에 직면해 대항-미학을 내놓는다는 것은 체계성을 위한 시학, 체계성에 적합한 재현가능성의 언어를 구축하는 데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다. 이와 같이, 대안을 발굴하는 일은 어려워 보이겠지만, 최초의 몇몇 단계들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널리 개방된 평면, 작성되기를 기다리는 방대한 정보학의 반()-역사, 기입되기를 기다리는 방대한 재현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알고리즘적 시스템을 위한 시학을 만드는 것은 이 시스템을 재현하기 위한 탐구에서 필수적이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첫 단계다.

 하나로부터 무를 분리하는 넓은 협곡, 그것이 재현불가능성의 딜레마다. 한편으로, 하늘 아래의 만물을 형식화되지 않은(unformed) 동일한 운명으로 강등시키는 첫 번째 테제의 필연적인 것은 없다라는 함정은, 세계를 냉소주의의 족쇄로 묶어 버리고 모든 삶을 모든 것에 대항하는 모든 것이라는 사이버네틱스적 투쟁으로 격하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단일한 권력 행위자(생산양식)에게 총체화하는 명령을 고취시키는 두 번째 테제의 오직 하나라는 함정은, 다성적인 욕망하는 힘들을 단조로운 표현의 단색 채널로 이동시킨다. 빛의 결핍은 재현을 보이지 않게 만들지만, 빛의 과잉은 눈을 부시게 하여 재현을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이 협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의 자가당착이다. 이와 같이, 재현불가능성의 문제는 세계의 협곡에 갇힌 상태로 있다. 다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재현불가능한 것이 있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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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운 좋게도, 이미 그런 시도를 위한 많은 훌륭한 가이드들이 존재한다. 현 논문의 주제에 특히 유용한 것은 수잔 벅 모스의 노련한 연구인 자본을 상상하기: 디스플레이에 대한 정치 경제 Envisioning Capital: Political Economy on Display’(1995)이다. [본문으로]
  2. 다른 곳에서 랑시에르는 플라톤주의가 그 중 히나인 감각적인 것의 세 가지 체제를 그린다(랑시에르, 2004). [본문으로]
  3. 현 에세이에서 시네마에 필요한 관심을 기울이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지나가는 투로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1988~98)이 랑시에르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고다르의 논의(그것을 논의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 때문이다.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고다르의 영화를 여는 것은 베르길리우스의 그것이 문제요, 그것이 힘든 일이다인데, 이는 관람자에게 영화의 핵심 주제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암시를 부여한다. 우리는 어떻게 지옥으로 하강하는가? 고다르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사유의 가능성은 그 순간에 말소됐습니다.’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을 다룬 랑시에르의 글은 특히 여기를 보라. ‘도덕 없는 우화 : 고다르, 영화, 역사/이야기들’(2006)문장, 이미지, 역사’(2007) (역자 설명: 갤러웨이가 언급하는 랑시에르의 글은 한국에도 번역된 그의 주저 영화 우화이미지의 운명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본문으로]
  4. 무엇보다 가장 솔직하지 못한 것은 니꼴라 부리요가 반포한 관계 미학이라는 개념일 수 있다. 이 미학에서 관계성 자체는 미학화되어 화이트큐브의 예술 세계로 수출된다.(200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