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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터미네이터 VS 아바타 (마크 피셔) 본문
이는 마크 피셔의 「Terminator vs Avatar」를 번역한 것이다. 번역은 처음이라, 많이 부족하다. 심각한(혹은 심각하지 않더라도) 오역이 눈에 띄었을 때 피드백을 해주신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
정치적 지식인들, 당신들은 왜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 있습니까? 무엇을 동정하길래?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당신들을 증오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부르주아고, 특권을 가졌고, 모나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에, 또한 당신들이 말해야 할 단 하나의 중요한 것―누군가는 자본의 배설물, 자본의 재료들, 자본의 쇠막대들, 자본의 폴리스테린, 자본의 책들, 자본의 소시지 파테들, 그것들을 몇 톤이나 배가 터질 때까지 흡입하면서, 흡입하는 것을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이런 사실이 또한 그들의 손, 엉덩이, 그리고 머리로 일하는 사람들의 욕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말하는 대신, 아, 당신들은 사람들의 지도자, 포주들의 지도자가 되고, 당신들은 몸을 기울여 누설합니다, 아, 하지만 그게 소외에요, 이건 아름답지 않아요, 잠시만, 우리가 소외로부터 당신을 구해줄게요, 우리가 노예상태에 대한 사악한 애정으로부터 당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할게요, 우리가 당신에게 존엄을 줄게요라고 말하기 때문에, 당신들에게 증오가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당신들은 가장 비열한 편―우리의 자본화한 욕망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멈추기를 당신이 바라는 그 도덕적인 편―에 스스로를 놓습니다. 당신들은 죄인과 함께 있는 신부와 같고, 우리의 노예적인 강렬함은 당신들을 겁먹게 합니다. 당신들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걸 견디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고통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물론 우리는 고통 받고 자본화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당신들이 우리에게 처방으로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역겹게 한다는 의미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치료법이나 바세린을 혐오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가장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양적인 과잉으로 폭발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발성이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리비도 경제』)
1993년에 그가 번역한 리오타르의 『리비도 경제』 도입부에서, 이안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는 ‘동시대적 지혜’의 특정한 ‘상환 기한(maturity)’을 언급한다. 그랜트가 보기에 이런 ‘상환 기한’에 따르면, 『리비도 경제』는 ‘약간은 순진한 반-철학적 표현주의와 1960년대 후기에 만연했던 니체에 대한 재개된 관심의 숙취에 시달린 미학화하는 경향의 작고도 단명한 폭발’이었다. 그랜트는 리오타르의 책을 다른 세 권과 한데 모은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뤼스 이리가레의 『반사경: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 그리고 보드리야르의 『상징적 교환과 죽음』. ‘『리비도 경제』는 일반적으로는 비판적 응답을 많이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랜트는 계속 적는다, ‘리오타르가 많은 맑스주의 친구들을 잃어버린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 몇몇 예외 말고는, 그 책을 가끔씩 언급하는 것은 지금은 리오타르 자신뿐이다. 그것에 새로운 경멸을 쏟아붓기 위해, 그 책을 그의 <사악한 책, 모두의 글쓰기와 사유를 (그처럼 하길) 유혹했던 책>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이는 사실로 그러했다. 벤 노이스(Benjamin Noys)가 그의 책 『부정적인 것의 지속: 동시대 대륙 이론에 대한 비판(The Persistence of the Negative: A Critique of Contemporary Continental Theory)』에서 『리비도 경제』와 『안티 오이디푸스』를 그가 ‘가속주의적’ 계기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분으로 배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두 텍스트의 몇 개의 인용구는 직접적으로 가속주의적 포석의 풍미를 준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하지만 어떤 쪽이 혁명적 경로인가? 저기에 있는가? 제3세계 국가들이 하도록 사미르 아민이 조언했듯, 파시스트적인 ‘경제적 해결책’의 기이한 부흥 속에서 세계 시장에서 물러나기?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시장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운동 내에서 계속해서 더 멀리 나아가기? 매우 분열적인 부호들의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아마도 흐름들은 아직 충분히 탈영토화되지도, 탈코드화되지도 않았다. 과정에서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가는 것, 니체가 말하길, ‘과정을 가속하는 것.’ 이 문제에 있어서 진실은, 우리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리비도 경제』―오직 악명 높게만 기억되는 텍스트의 한 구절에선:
영국의 실업자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노동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꽉 붙잡고 내게 침을 뱉으며―광산에, 주조 공장에, 공장에, 지옥에 매달려 있던 히스테릭하고, 마조히즘적인 어떤 고갈이든 즐겼다. 그들은 사실 그들에게 부과됐던 유기체적 신체의 광적인 파괴를, 그것을 즐겼다.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정체성, 소작농 전통이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정체성의 분해를 즐겼고, 그들의 가족과 마을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즐겼고, 아침저녁 교외와 펍의 새로운 괴물같은 익명성을 즐겼다.
리오타르에게 침을 뱉어라 그들은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락에서 주장된 추문과도 같은 자연에는 무엇이 거주하고 있나? 손들어라, 자신들의 익명적인 교외와 펍을 포기하고 농촌의 유기적인 진흙탕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이 말은 즉, 손들어라, 전-자본주의적 영토인 가족과 마을공동체로 돌아가길 정말로 원하는 사람들은. 더욱이, 손들어라, 회복된 유기적 전체에 대한 욕망이 자본주의의 리비도적 하부구조에 완전히 병합됐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욕망이-역자 추가) 후기 자본주의와 관계없다고 정말로 믿는 사람들은. 할리우드는 말한다, 우리가 인터넷에 상시 접속된 기술 중독자이자 사이버스페이스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는, 우리의 진정한 내면에선, 우리는 군사-산업 복합체에 의해 희생되고 어머니/행성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원시인이라고.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는 의미심장한데, 이것이 부인(disavowal)이 어떻게 약화되는지 보여주는 그 순간조차에도 후기 자본주의 주체성에 구성적인 부인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판도라의 유기적인 목가 파괴를 전제로 하는 현존을 가진, 영화적인 프로토-VR 기술의 미덕에 의해서만 내면의 원시적인 존재-되기로 플레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들의 비참함 속에 존재하는 싸구려 할리우드 휴가 외에는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리오타르가 얘기했듯, 만약 원시적인 사회 같은 건 없다면(그렇다, 터미네이터는 그것(터미네이터)의 도래를 가속하기 위해 마이크로칩을 뿌리고 다니면서 시작부터 거기에 있었다), 그때 유일한 방향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자본의 배설물, 자본의 쇠막대들, 자본의 폴리스테린들, 자본의 책들, 자본의 소시지 파테들, 자본의 사이버스페이스 매트릭스를 통과해서?
난 세 가지 주장을 하고 싶다:
1. 모든 사람들은 가속주의자다.
2. 가속주의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3. 가속주의가 아니라면 맑스주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랜트가 그의 묶음에서 언급했던 70년대의 텍스트 중에서 『리비도 경제』는 어떤 점에서는 90년대 영국의 사이버-이론에 가장 결정적인 연결고리다. 중요한 것은 단지 내용뿐만 아니라, 『리비도 경제』의 무절제한 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지젝이 니체에 대해 말했던 것을 상기할 수도 있겠다. 내용의 수준에서, 니체의 철학은 지금이라면 탁월하게 동화될 수 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적어도 학계에서 엄숙하게 논의되는 종류의 것이 아닌, 동시대에 (그것과는) 비슷한 걸 상상할 수 없는 문체인 욕설(the invective)이다. 이안 그랜트와 벤 노이스는 모두 『리비도 경제』를 긍정의 작업으로 묘사한 리오타르 자신을 따르지만, 니체의 텍스트와 비슷하게도, 『리비도 경제』는 (표면적으로는 괄호쳐진) 일련의 증오들 내에서 텍스트의 대부분에 관여하며, 그것의 긍정을 상습적으로 유보한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많은 방식으로 후기 60년대의 텍스트로 남아 있다면, 『리비도 경제』는 70년대 펑크를 예측하며, 펑크가 회고적으로 투사했던 60년대에 의지한다. 리오타르의 ‘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네(yes)’ 아래 멀지 않은 곳에는 증오, 분노, 그리고 좌절의 아니오(No)가 있고, 만족없음, 재미없음, 미래없음이 놓여 있다. 이런 부정성의 자원들이 좌파가 다시 접촉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리비도적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치학에 대한 들뢰즈-가타리/『리비도 경제』의 강조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리비도를 도구화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리비도 경제』가 부인되었다면, 하지만 더 자주는 무시되었다면, 그랜트 자신의 번역이 기여했던 90년대의 이론적 계기들은 더 심할 정도로 잘못되어 왔다. 사변적 실재론의 창시자로서의 그의 요즘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랜트의 선동적인 90년대의 텍스트들―칸트,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와 조우하는 숭고, 사이보그, 수술, 봉합, 블레이드 러너―은 (담론의-역자추가) 순환으로부터 거의 사라져왔다. 그랜트의 한때 스승이었던 닉 랜드의 작업들은 조롱적인 논평조차도 끌어내지 못한다. 『리비도 경제』와 같이, 그의 작업도 비판적 응답을 조금도 끌지 못했고, 과장을 보태지도 않고 말하면, 랜드는 잃을 만한 맑스주의 친구들도 없었다. 사실 강단 좌파에 대한 증오는 랜드의 작업의 리비도적 동력 중 하나였다.
그가 「기계적 욕망」에서 쓰기를:
기계적 혁명은 그러므로 사회주의적 규제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야만 하며, 사회적 장을 찢어발기는 과정들의 더욱더 제약을 받지 않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향해 밀고 나아가야 하며, ‘시장의 운동,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운동’과 함께 더 멀리 가야만 한다. 그리고 ‘아무도 탈영토화의 방향으로 충분히 멀리 가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랜드는 우리의 니체였다―이른바 진보적인 경향들에 대한 똑같은 괴롭힘, 반동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의 똑같은 기이한 혼합, 19세기의 아포리즘들을 코도 에슌이 말한 ‘표본 속도에서의 텍스트’로 업데이트하는 글쓰기 스타일. (추상적이고 화학적인 면에서의) 속도는 여기서 결정적이었다. 전신의(telegraphic) 테크-펑크 도발들은 완전한 포스트-구조주의적 대륙주의의 과시적 사유를, 글쓰기가 더 힘들고 고될수록 사유도 그만큼 더 진행되어야 한다는 그 도발의 함축으로 대체한다.
랜드의 다른 이론적 도발들의 이점이 무엇이든 간에(나는 곧 이런 도발의 몇몇 문제점들을 제시할 것이다), 랜드의 강단 좌파―혹은 가끔 스스로를 강단 맑스주의라고 칭하는, 부르주아화된 국가 보조를 받는 불평불만들―에 대한 기죽일 만한 공격은 여전히 정곡을 찌른다. 이런 ‘출세에 미친 철면피’들의 불문율은 어떤 사람도 부르주아 주체성의 포기가 일어나길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인 한잔 하시죠, 저는 트집 잡는 비평을 할 수 있는 경력의 가치를 얻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정치학으로 가장한, 프티 부르주아의 이익에 대한 가차 없는 방어를 보게 된다. 적대에 대한 논문을 쓰고, 그 후에는 모두 술집으로 가버린다. 이 대신에 랜드는 ―정신증과 자동-유발된 분열증의 지점에서―성실하게 스피노자-니체-맑스주의의 경고를 취하는데, 이는 이론이 재현의 수준에 머무른다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그렇다면, 랜드의 철학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요약해보자: 베르그송의 생기론에 무자비하게 빼앗긴, 그리고 프로이트의 죽음 욕동과 쇼펜하우어의 의지 같은 이전 프로그램과 호환되도록 만들어진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적 욕망. 그리고 역사의 헤겔-맑스주의적 동력은 돌진하는 니힐리즘에 이식된다. 바보 같은 자유의지는 즉각 더 이상 순환하지 못하고, 욕동으로 업그레이드돼서, 종결이라는 종말론적 지점이 없는 일련의 강도적 임계점으로 지구의 역사를 끌고 가는 유사-기술인공지능 견인자에 의해 인도된다. 그리고 오직 우연적으로 물질적 기질이 다 타버릴 때가 되면/될 때, (욕동으로 업그레이드된 자유의지는) 경험적 종결에 도달한다. 이것은 도치된 헤겔-맑스주의적 역사유물론이다. 자본은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끝끝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더 정확히 하자면, 인간들은 자본의 고기 꼭두각시다. 그들의 정체성과 자기 이해는 궁극적으로 벗길 수 있는/벗겨지게 될 시뮬레이션이다.
두 개의 텍스트 표본이 서사를 확립한다
부흥하는 행성 교역은 국면들을 압축하는 것을 통해 세계의 무질서에 시동을 걸면서, 신성 로마 제국,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 제2 제국과 제3 제국 그리고 소비에트 인터내셔널을 부숴버린다. 탈규제와 국가 군비 경쟁 각각은 사이버 스페이스로 향한다.(닉 랜드 「기계적 욕망」)
기술들이 점점 더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기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는 중단되고 있다. 인공지능이 생물학적인 것의 지평을 능가하려면 아직은 몇 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적 문화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몇 세기 동안 표지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순전히 미신적이다. 형이상학적 불멸은 고사하고 말이다. 사유에 대한 가장 확실한 길은 더 이상 인간적 인식의 심화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비인간-되기, 부상하고 있는 행성 기술감각적 저수지를 향한, 인간적 문화가 용해되는 ‘탈인간화된 풍경...텅 빈 공간들’을 향한 인식의 이주를 통과한다. (닉 랜드 「회로망들」)
이것은―꽤나 의도적인―사이버펑크 픽션으로서의 이론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 개념은 터미네이터 영화의 시간-구부림에 펄프로 용접된 모든 이전의 형성물들을 사로잡는 사실상 이름붙이기 힘든 물(Thing)이다. ‘인류에게 자본주의의 역사라고 보이는 것은, 기계적 욕망이 가진 것처럼 전적으로 적의 자원들로부터 자신을 조립해야만 하는 인공지능에 의한 미래로부터의 침략이다.’ 메가-죽음욕동으로서의 자본은 터미네이터다. 그것은 ‘흥정될 수도, 설득될 수도 없고, 연민이나 회한 그리고 두려움을 보여주지 않으며, 전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터미네이터>, <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프레데터>에 대한 랜드의 해적질은 그의 텍스트들을 수렴적 경향, 즉 혐오되기 보다는 환희되어야 할 비인간적 미래를 디지털적 음향 생산이 열어젖히는 곳인 가속주의적 사이버문화의 일부분으로 만든다. 랜드의 기계적 이론-시가는 동일한 시네마적 원천에서 샘플링하고 또한 ‘댄스플로어로 접근 가능하게 된 임박한 인간 멸종’을 기대했던 90년대 정글, 테크노, 그리고 둠코어의 디지털적 강렬함과 유사하다.
이것이 좌파와 무슨 상관인가? 글쎄, 한 가지만 말하자면 랜드는 좌파가 필요로 하는 일종의 반동적 인물이다. 랜드의 사이버 미래주의가 유효기간이 지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정글과 테크노가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만 그러하다. 이는 정글과 테크노가 새로운 미래에 의해 대체되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미래가 회고에 굴복해왔기 때문에 그러하다. 실제로 근미래는 자본이 자신의 라텍스 마스크를 벗기고 기계적인 죽음의 머리 하부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바로 새로운 진실함, 키치하고 귀여운 팝에 의해 광고되는 애플 컴퓨터. 패스티시, 재현부, 하이퍼-이분화된 신경증적 개인주의가 지배적인 문화적 경향이 될 정도를 예상하지 못한 실패는 우발적 오류가 아니다. 이 실패는 자본주의의 동역학에 대한 근본적 오판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이 18세기 부르주아 혁명의 깃털 펜과 흰 가발로의, 혹은 1968년 5월의 실패에 대한 끝없이 반복되는 논리로의 회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둘 모두 현재 우리가 내장되어 있는 정치적이고 리비도적인 영역에 대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랜드의 사이버고딕 리믹스가 많은 점에서 원전에 비해 뛰어난 반면,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해에서 벗어난 일탈은 치명적이다. 랜드는 자본주의를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열증이라 부르는 것으로 붕괴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랜드는 자본주의가 탈영토화와 보상적인 재영토화의 동시적 과정을 통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결정적인 통찰을 잃어버린다. 자본의 인간적 얼굴은 끝내 한쪽으로 치워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나 선택적 구성요소, 혹은 궁극적으로 처분해버릴 수 있는 콘돔 막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유발하는 탈코드화의 추상적 과정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되기를 멈추지 않도록 반드시 즉흥적인 의고주의에 의해 제한된다. 비슷하게, 시장은 페르낭 브로델이나 마누엘 데란다가 묘사한 자기 조직적인 네트워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월마트 같은 유사-독점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주의가 반-시장이라는 것이다. 빌 게이츠가 사유의 빠름에서 사업을 약속했지만 자본주의가 전달한 것은 사업의 빠름에서의 사유다. 타성과 정체상태를 은폐하는 혁신과 새로움의 시뮬레이션.
정확이 이런 이유로, 가속주의는 반자본주의적 전략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런데, 반자본주의적 전략뿐만 아니라, 맑스주의라 자칭하는 어떠한 정치적 프로그램이든 그 일부분이 되어야만 하는 그런 전략으로서 말이다. 자본주의가―성장이 많은 점에서 환상에 불과하다는―스태그플레이션을 향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가속주의가 ‘테러적’이라고 알렉스 윌리엄스가 특징지은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이다. 가속주의의 유령이 나타날 때 자동반사적인 사회주의적 인본주의가 상상할지도 모르는 일종의 착취의 강도화는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리오타르가 제안했듯,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판으로 침몰하는 좌파는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의미라도 있다면 옹호해야만 하는 반정체성주의적 미래주의에 대한 절망적인 배신이다. ‘유토피아로서의 월마트’의 저자 프레드릭 제임슨이 논했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선과 악을 넘어선 새로운 움직임이며, 제임슨이 얘기하길, 이는 다름 아닌 공산주의 선언문에서 찾아야만 한다. ‘선언문은’, 제임슨이 쓰기를, ‘자본주의를 역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계기이자 동시에 가장 파괴적인 것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선언문은 선과 악을 동시에, 그리고 시간에서의 동일한 현존의 불가분하고 풀 수 없는 차원들로서 사유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 이는 많은 독자들이 니체적 프로그램의 탓으로 돌리곤 하는 냉소주의와 무법상태보다도 선과 악을 초월하는 데에 더 생산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미래를 포기해왔는데, 자본주의는 미래를 배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뉴트적 태도(끝까지 변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완고한 태도를 말한다-역자)를 향한 동시대 좌파의 경향들, 저항과 장애물에 대한 그들의 수사학은 그것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라는 자본의 반/메타적 서술과 결탁한다. 실패한 혁명의 논리를 뒤로하고, 다시 앞을 향해 사유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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